영화/두번 봐도 재밌는 영화(★★★)

일라이(The Book of Eli) 2010년 - 1부 그 남자의 미션(리뷰편)

homeostasis 2025. 1. 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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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는 문명이 끝장 나버린 지 오래 된 근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핵전쟁이 멸망의 원인인 듯 하다. 생존자들은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간다. 폭력, 강간, 살인이 일상이며, 인육을 먹는 사람도 다수다. 밖에 나가려면 고글이나 선글래스로 눈을 보호해야 한다. 감독 휴즈 형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적 무드를 강조하기 위해 흑백에 가깝게 영상에서 색채를 뺐다. 태양도, 꽃도, 나무도 제 색깔을 잃고, 시뻘건 피도 잿빛으로 보인다. 영화의 탈색된 영상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 대한 은유이면서, 주인공 일라이(덴젤 워싱턴 / Denzel Washington)를 강조(주인공의 피부는 검고, 악당들은 모두 백인)하는 수단이다. 또 한편으로 폭력의 수위를 낮추는(빨간 피를 보여주는 것보다 덜 충격적) 효과도 있다.

※ 스포일러 경고!!!

 

 

1. 방랑자

영화의 도입부는 한 편의 시(詩)라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하다. 7분 가량 대사 없이 이미지 만으로 작품의 세계관과 주인공을 소개한다. 감각적 영상과 덴젤 워싱턴의 진지한 연기는 영화에 숭고함을 불어 넣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폐허 뿐이다. 일라이는 척박한 환경에서 음식을 구하고, 시체를 뒤져 생필품을 찾아내고, 무너져 가는 집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계속 길을 걷는다. 그는 방랑자다. 어떤 사명을 위해 LA를 향해 걷고 있다. 무려 30년간 도보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 중이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명은 어떤 책을 서쪽 바닷가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책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무슨 책인지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의 여정은 바이크 갱, 약탈자 등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 받는다. 일라이는 커다란 마체테 칼, 석궁, 권총을 무기 삼아 자신 만의 미션을 이어 나간다. 일라이가 영화에서 처음 타인을 만날 때, 우리는 영화의 첫번째 유혈 액션을 보게 된다. 그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십중팔구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이다. 동정심을 이용해 습격을 하여 물건을 뺏거나 일라이의 몸(음식으로서) 그 자체를 노린다. 일라이는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다양한 방법으로 불한당들을 상대한다. 칼로 손목을 날리고, 활로 상대의 목을 꿰뚫고, 샷건과 권총을 들고 오우삼 영화 뺨치는 총격전도 벌인다. 그 폭력을 굉장히 스타일리쉬하게 묘사한다. 격투 장면에서 덴젤 워싱턴을 그림자에 가두어 싸움의 실루엣만 보여 주거나, 360도 원형 트래킹으로 물 흐르듯 담아낸다. 아비규환과 같은 대형 전투를 컷트 없이 롱 테이크(처럼 보이게) 연출로 찍어낸 장면도 있다. 액션 장르의 골수팬들도 박수를 보낼 만한 수준이다.

 

2. 신의 목소리

주인공의 고독, 외로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던 영화는 일라이가 어떤 마을에 당도하면서 서부극으로 변모한다. 이 마을의 외양은 미 서부 개척 시대와 거의 똑같다. 이 공간에서 펼쳐 질 내러티브 역시 전형적인 웨스턴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악인 카네기(게리 올드만 / Gary Oldman 분)와 일군의 무법자들의 폭정에 신음한다. 이때 신비한 방랑자 일라이가 구원자처럼 나타난다. 정체 모를 목사가 시골 마을에서 폭군처럼 군림하던 무법자들을 물리치는 웨스턴 <페일 라이더>가 떠오른다.

이 마을은 나름의 시스템을 갖춰 운용되고 있다. 술집, 식당, 잡화점, 여관 등이 영업을 하고, 의사, 엔지니어 같은 기술자도 존재한다. 모든 거래는 철저히 물물 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신용이 무너진 세상이라 화폐 거래는 불가능하다. 카네기는 어떻게 이런 마을을 건설하고, 지배할 수 있을까? 그 힘의 원천은 그가 안전한 식수원을 장악한 데서 비롯된다. 지식과 정보의 힘을 잘 아는 자다. 카네기는 더 큰 힘을 얻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간절히 구하는 중이다.

그렇게 많던 '책'이 멸망 후에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다. 유일하게 남은 그 책을 일라이가 지니고 있었다. 카네기와 일라이가 충돌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카네기는 전문 용병과 기관총, 로켓포 같은 중화기까지 갖고 있다. 그에 맞선 일라이의 무기는 단촐하다. 하지만 그에겐 신의 가호(加護)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가 일라이와 카네기 일당 간의 총격전이다. 카네기 일당은 무력 시위를 통해 일라이를 굴복시키려고 한다. 이쪽의 수가 압도적이라 일라이가 반항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조롱까지 한다. 하지만 일라이가 총을 꺼내 힘으로 돌파를 시도하자 깜짝 놀란다. 더 놀라운 것은 일라이가 쏜 총은 백발백중이지만, 카네기 쪽은 그 누구도 일라이를 맞추지 못한다. 일라이는 용병대장  레드리지(레이 스티븐슨 / Ray Stevenson)가 바로 코 앞에 서 있는데도 뒤돌아 태연하게 걸어가고, 레드리지는 급기야 쏘기를 포기하고 총을 집어 넣는다. 왜 쏘지 않았냐고 채근하는 카네기에게 레드리지는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답한다. 이 시퀀스는 관객들에게 마치 기적을 목도한 것 같은 숭고함을 준다.

 

3. 그의 미션

<일라이>는 종교적 숭고함과 장르영화로서의 재미, 이 두 가지 방향성 가운데 적절히 균형을 잡는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일등 공신은 배우들의 연기다.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이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 놓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적으로 고양되는 듯한 느낌, 평범한 액션 스릴러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면 전적으로 덴젤 워싱턴의 존재감 때문이다. 게리 올드만은 덴젤 워싱턴에 맞설 만한 카리스마를 갖췄다. 80년대 청춘스타 제니퍼 빌즈는 비참한 신세의 캐릭터에 우아함을 부여한다. 일라이의 여행 파트너가 되는 밀라 쿠니스, 용병대장 역의 레이 스티븐슨 모두 제 몫 이상을 했다.

하지만 감독 휴즈 형제는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 긴장을 조금 늦춘 듯 하다. 마지막에 가서 미스터리는 해소되고, 30년간 이어졌던 일라이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반전은 있지만,  영화는 급격히 '신앙', '기적', '신의 배려' 같은 것들에 몸을 맡긴다. 시(詩)로 시작했던 영화가 장르 소설을 거쳐 크리스쳔 판타지로 끝맺음 한다. 일라이는 결국 '신의 도구'에 불과(?)했구나 싶어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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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The Book of Eli) 2010년 - 2부 줄거리 등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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