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刺馬 / The Blood Brothers) 1973년 - 1부 사랑과 야망(리뷰편)
1870년 8월 22일, 청나라 양강 총독 마신이가 암살된다. 범인 장문상은 총독부 앞,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마신이를 칼로 찔러 죽였다. 범행 직후 순순히 체포되었는데, 장문상의 이러한 태도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했거나, 혹은 뒤를 봐줄 사람이 있거나 그 둘 중 하나다. 범행이 워낙 대담했고, 양강 총독 마신이가 그 유명한 증국번의 후임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청나라 조정의 조사 발표(단순 원한에 의한 살인)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정치적 암살설(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며 최대 군벌로 성장한 증국번 - 이홍장이 신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신이를 죽였다는) 등 온갖 음모론이 제기되었고, 이른바 '마신이가 칼에 찔려 죽은 사건(刺馬案)'은 청조말 최대 스캔들 중 하나로 확대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장문상은 그야말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형 집행관들은 산 채로 장문상의 내장을 꺼낸 뒤 머리를 잘라 마신이의 위패 앞에 바쳤다. 이런 점이 '피의 시인' 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장철의 1973년작 <자마>는 야심 가득한 남자들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자멸극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청춘 남녀의 신분 상승 욕구, 비틀린 성적 욕망으로 꿈틀댄다.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영화라는 점, 그리고 주제에 있어서 장철 감독이 1년전에 만든 <마영정(馬永貞 / The Boxer from Shantung)>과 매우 흡사하다.
1. 나쁜 놈들
폭력을 편안하게 보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홍콩)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협의를 추구한다. 이 영화 <자마>의 주인공들은 좀 다르다. 그들은 악인이다. 마신이(적룡 - 狄龍 / Ti Lung)는 출세지향적이며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목표다. 또 다른 주인공 장문상(강대위 - 姜大衞 / David Chiang Da Wei)과 황종(진관태 - 陳觀泰 / Chen Kuan Tai)은 노상강도 출신이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마신이는 출세를 위해 태평천국, 즉 반란군에 가담하려는 여정 중에 황종, 장문상과 의기투합한다. 꽤나 악명 높은 산적 두령 엄진풍(번매생-樊梅生 / Fan Mei Sheng)을 죽이고 그의 무리를 통째로 흡수한 세 남자는 작게나마 세력을 구축한다. 황종과 장문상은 충분히 만족하지만, 마신이의 야심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청나라 고위 관료가 되고, 의형제들을 이끌고 태평천국 토벌전에서 큰 공을 세워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다. 바로 그 순간 - 성공의 정점에서 장르(갱스터)의 법칙이 작동하여 주인공들은 예정된 파국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영화 초반, 집단 결투 시퀀스에서 두 명의 산적이 주인공의 공격을 받고 언덕을 구른다. 빠른 속도로 굴러야 볼 맛이 나는데, 마치 체육시간에 줄 지어 앞구르기 하듯 느릿느릿,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예쁘게 굴러 떨어진다. 스턴트맨들이 몸을 사리나? 왜 감독은 이 장면을 그냥 내버려 뒀지? 속으로 'NG 컷이다'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장면의 의아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카메라가 오랫동안 굴러 떨어지는 이미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자마>에선 이 장면 말고도 언덕에서 구르는 동작이 여러번 반복된다. 마신이와 장문상이 대결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그 하이라이트다. 한때 우정을 나눴던 적룡과 강대위는 이제 서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다 중심을 잃고 언덕을 구른다. 눈부시게 빛나던 적룡과 강대위의 신체가 흙먼지에 뒤덮인다. 그들의 몸동작은 허무하기 그지없다.빠른 상승과 기나긴 추락의 운동 에너지, 이건 <자마>와 갱스터 장르를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이다.
2. 냉소
나르시즘에 가득 찬 남성 영웅은 장철 영화의 필수 요소였다. 장철은 남자 배우를 멋지게 연출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왕우, 적룡, 강대위 같은 무비 스타를 만들었다. 특히 적룡과 강대위는 장철이 생각한 영웅의 ‘양’과 ‘음’을 대표했다. 적룡은 항상 상반신을 노출하여 멋진 몸매를 과시했고, 강대위는 한 번도 맨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적룡은 태양처럼 뜨겁고, 정열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강대위는 차갑고, 침착하며 보다 이성적인 캐릭터를 맡았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적룡이 계략에 빠져 죽으면, 강대위가 돌아와 복수하는 스토리를 장철 감독은 지겹도록 반복해서 영화로 만들었다.
장철에게서 변화가 감지된 것은 1972년 <마영정>부터다. 진관태, 왕종, 이수현, 부성, 척관군, 베놈스 등의 신인 배우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투톱 중심의 영화에서 집단극으로 이동한다. 이때 아름다운 남성 영웅에 대한 집착 또한 서서히 내려놓게 된다. <자마>의 경우는 아예 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장철이 점점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반증처럼 보인다.
<자마>는 탐욕으로 망가져 가는 남자들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이들이 그나마 덜 망가졌을 때, 장철은 과거처럼 아름다운 적룡, 쿨한 강대위, 젊음으로 꿈틀대는 진관태의 매력을 직관적으로 묘사한다. 드라마 상 인물들이 타락해 감에 따라 세 배우의 매력은 점점 사라져 간다. 적룡은 표정이 사라지고, 강대위는 불안에 떨고, 진관태는 술, 여자, 조금의 권력만 탐하는 단순무식한 인물로 변해간다.
적룡, 강대위, 진관태는 한편으로, 혹은 적으로 여러 차례 격투 장면을 소화한다.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하나 같이 길고, 무기(장검, 팔참도, 삼절곤 등)를 들고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주 위험해 보인다. 주연배우들 모두 고난이도 동작을 소화하려고 많은 고생을 했을 터인데... <자마>의 액션은 멋있다기보다 허무한 몸짓에 가깝다. 중반부까지 세 명의 주인공이 산적과 싸우거나 태평천국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그 목적이 대의가 아닌 개인의 영달을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몰입 대신 싸움을 관찰하게 된다. 구조로 보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할 마신이와 장문상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여주인공 미란이 저 멀리서 이 결투를 지켜보다 결론이 나기 전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미 공멸은 불가피하고, 누가 이길 지 중요하지 않다. <자마>는 장문상이 쓴 자술서 내용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장문상은 왜 마신이를 죽이려 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힌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폐기 처분되고, 장문상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장문상, 황종, 마신이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결말이다. 냉소와 허무로 가득하다.
3. 악녀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 <자마>에서 조연출을 맡은 - 의 <첩혈가두>(1990년)는 세 남자의 우정과 파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마>와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첩혈가두>가 돈 때문에 세 친구의 우정이 박살난다면, <자마>는 돈이 아니라 황종의 처 미란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미란은 이미 결혼했음에도 다른 남자 마신이를 욕망한다. 더욱이 남편과 마신이가 의형제 지간이라 미란의 욕망은 금기 of 더 금기다.
평소 정숙한 여인을 주로 연기했던 정리(井莉 / Ching Li)가 악녀 '미란' 캐릭터를 맡았다. 그래서 충격이 더하다. 어떤 장면에선 정리의 얼굴이 괴기스럽게 보일 정도다. 미란은 마신이를 몰래 엿보다 한숨짓고, 마신이가 땀 닦은 손수건을 얼굴을 비벼댄다. 그러다 냇물가 장면에서 참아왔던 욕정이 폭발하는데 미란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마침 거기 있던 마신이가 달려가 부축을 한다. 자연스레 마신이의 시선은 물에 젖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몸매로 향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격렬히 포옹한다.
보통의 영화는 남자가 여자를 탐해 사달이 난다. 하지만 <자마>는 미란이 먼저 욕망했음을 분명히 해 둔다. 그 결과 미란은 남자들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황종은 마신이의 계략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고, 마신이는 파렴치한이 되어 장문상에게 벌 받는다. 장문상은 마신이를 죽인 죄로 형장의 이슬로 변한다. 감독은 결국 혼자 남게 된 미란을 어둠 속에 가둔다. 미란은 그 안에서 생기를 잃고 무표정하게 눈물만 흘린다. 그릇된 욕망을 품은 여인에 대한 징벌이 아닐 수 없다. 이 순간 영화는 도덕극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연출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마>에서 가장 빛이 나는 순간은 미란이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장면이다. 영화 속 모든 액션 장면은 잊어도, 정리의 아찔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배우 정리가 <자마>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셈이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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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1) 범인 장문상총독 마신이(적룡 - 狄龍 / Ti Lung)가 백주대낮에 의형제이자 부하였던 장문상(강대위 - 姜大衞 / David Chiang Da Wei)의 칼에 맞아 죽는다. 장문상은 떳떳한 표정으로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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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le - 오우삼 / Joh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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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장철(張徹 / Chang Cheh)이 애지중지했던 4명의 스타, 적룡(狄龍 / Ti Lung), 강대위(姜大衛 / David Chiang Da Wei), 진관태(陳觀泰 / Chen Kuan Tai), 왕종(王鐘 / Wang Chung)을 내세워 만든 현대 배경의 액션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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