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두번 봐도 재밌는 영화(★★★)

코 끝에 걸린 사나이(The Hard Way) 1991년 - 무초식의 초식

by homeostasis 2024. 8. 6.
반응형

UPI(Universal Pictures International)는 한국에 진출한 최초의 할리우드 직배사로서 1987년 말부터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 영화의 국내 배급을 담당했다. '직배'라는 단어를 들으면 50대 이상 분들은 극장에 뱀을 풀면서까지 격렬히 저항했던, 한국 영화인들의 직배 반대 투쟁이 자동 연상될 것이다. 그 UPI 코리아가 1990년 5월, ZAZ 사단의 코미디 영화 <The Naked Gun>를 배급한다. 지금부터는 혼자만의 상상이다. 당시 홍보 담당자는 <네이키드 건>이라는 원제가 골 때리는 코미디 영화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다고 판단, 다른 제목을 찾다가 영화의 포스터 - 레슬리 닐슨이 총알을 타고 있는 - 에 주목한 것 같다. 결국 이 영화는 <총알 탄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다.

 

 

1. UPI의 '사나이' 삼부작

<총알 탄 사나이>가 화제 몰이에 성공하면서 UPI 코리아는 '사나이'라는 단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된다. 90~91년에 배급한 영화 두 편도 비슷한 제목으로 바꾸어 개봉하는데,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Kindergarten Cop>(1990년)는 <유치원에 간 사나이>로, 마이클 J. 폭스의 <The Hard Way>(1991년)는 <코 끝에 걸린 사나이>란 타이틀로 극장에 걸린다. 나는 이 세편을 묶어 'UPI의 사나이 삼부작'이라 부르고 싶다. <총알 탄 사나이>는 앞서 말한 대로 포스터 디자인에서 따온 것이고, <유치원에 간 사나이>는 형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유치원 교사로 위장 잠입을 한다는 내용에서 비롯됐다면, <코 끝에 걸린 사나이>는 어째서 <코 끝에 걸린 사나이>일까?

 

 

2. 코 끝에 걸린 사나이

이 영화는 할리우드 무비 스타 닉 랭(마이클 J. 폭스 / Michael J. Fox)과 뉴욕의 민완 형사 존 모스(제임스 우즈 / James Woods)가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개봉을 앞둔 닉 랭의 신작 <스모킹 건 2>의 프로모션이 한창이다. TV만 틀면 토크쇼에 영화 홍보 차 출연한 닉 랭이 보이고, <스모킹 건 2>의 티저 예고편도 다양한 버전 - <인디아나 존스>류의 어드벤처 무비로 보인다 -  으로 수차례 등장한다. 영화 속 마케팅 중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설치된 닉 랭의 3D 대형 입간판이다.

 


제작진은 관광객들로 가득한 뉴욕 한복판에 실제 대형 빌보드를 설치하고 10일간 야간 촬영을 감행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과 구경군들로 난리법석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은 대형 입간판을 무대로 위험천만한 숨바꼭질을 벌인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러쉬모어 산(山) 시퀀스의 타임 스퀘어 버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UPI 마케팅 담당자는 주인공들이 코 끝에 매달린 장면을 보고 영화의 제목에 관한 영감을 얻는다.

 

3. '어나더' 버디 코미디

<코 끝에 걸린 사나이>는 8~90년대 할리우드의 주력 상품이었던 버디 액션 코미디 장르의 영화다. 이 장르의 대표작으로 <48시간>, <미드나이트 런>, <리썰 웨폰>, <러시 아워> 시리즈 등이 있다. <48시간>은 거친 터프 가이 형사 닉 놀테와 범죄자 에디 머피가 함께 악당을 물리친다. <미드나이트 런>은 '바운티 헌터' 로버트 드니로와 회계사 찰스 그로딘이 짝패로 등장한다. <리썰 웨폰>은 터프 가이 멜 깁슨에 뭔가 짠한 대니 글로버를 붙여 두었고, <러시 아워>는 무술 잘하는 성룡과 웃기는 크리스 카터가 콤비로 등장한다. <코 끝에 걸린 사나이>에서는 제임스 우즈가  닉 놀테, 로버트 드니로, 멜 깁슨가 했던 터프 가이 역할을 맡고, 마이클 J. 폭스가 에디 머피, 찰스 그로딘, 크리스 카터가 맡았던 웃음 유발자 역할을 한다.

 

 

4. 물과 기름

제임스 우즈가 연기한 존 모스는 <리썰 웨폰>의 마틴 릭스 캐릭터에 불같은 성질을 더하고, 성적 매력을 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제임스 우즈는 멜 깁슨처럼 섹시하지도, 스티브 맥퀸처럼 쿨한 배우도 아니면서 비호감 캐릭터를 호감형 인물로 탈바꿈하는 기적을 선보인다. 영화사의 무수한 터프가이 경찰 캐릭터와 같이 부인과 헤어졌고, 담배를 끊으려 고군분투 중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금연을 시도하는 중이라면, 반드시 금연을 어렵게 만드는 사건이 생긴다. <코 끝에 걸린 사나이>의 경우에 '파티 클래셔'라 불리는 연쇄살인범이 모스의 신경을 긁는다. 모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을 저지르고 조롱을 한다.

마이클 J. 폭스가 연기한 닉 랭은 인기 절정의 무비스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같은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는 하드 보일드 형사 캐릭터가 자기 커리어에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TV 뉴스에 나온 모스 형사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는다. 급기야 모스와 같이 범죄현장을 다니며 캐릭터를 연구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닉은 스타 파워를 활용, NYPD 고위층의 환심을 산다. 결국 모스의 임시 파트너가 되어 일주일간 함께 지내게 된다. 수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모스는 때아닌 보모 역할을 지시받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짜증을 느낀다.

 

5.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처음부터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함께 지내는 동안,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장점을 파악한다. 분노 충동 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괴팍한 성미의 모스가 뜻밖에도 피아노가 취미인 반전 매력의 소유자로 밝혀진다. 싱글맘 수잔(아나벨라 시오라 / Annabella Sciorra)과 로맨스를 시작했지만, 경찰이라는 직업과 이혼의 상처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이런 모스에게 남녀관계를 통달한 듯한 닉이 큰 도움을 준다.

닉은 여자들의 호감을 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상냥함과 공감능력이다. 모스를 경계하던 수잔의 어린 딸 보니(크리스티나 리치 / Christina Ricci)의 마음을 손쉽게 얻어낸다. 모스는 닉의 재능에 관심을 보이면서 서서히 유대감을 쌓게 된다.

야간의 한 술집에서 수잔 때문에 상심한 모스를 상대로 닉이 쿨 팁을 전수해 주는 장면이 있다. 닉은 배우로서의 장기를 살려 수잔으로 빙의, 일종의 대화 치료를 시도한다. 처음엔 거부하던 모스가 어느덧 상황에 몰입해 닉을 수잔처럼 여기며 대화를 이어간다. 바텐더는 둘의 대화를 엿듣다 게이들이라 생각해 경악한다. 이 장면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이를 담아내는 촬영, 편집의 합이 어찌나 절묘한지 볼 때마다 즐겁다.   

 

6. 정글 뉴욕

<코 끝에 걸린 사나이>를 보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가 뉴욕에 대한 묘사다. 뉴욕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60만 건 이상의 중범죄가 발생하는 최악의 범죄도시였다. 형사 모스는 닉 랭과 함께 사건 수사를 위해 빈민가를 돌아다닌다. 이곳이 할렘인지 브롱크스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처럼 묘사해 놓았다. 동양계 갱들은 차를 타고 다니며 건물 벽에다 M16 자동소총을 난사한다. 그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 안에서의 장면도 재미있다. 불량배가 승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자, 승객 모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방에서 총을 꺼내 겨눈다. 이게 과장된 코미디인지 실제 상황에 대한 풍자인지 헷갈린다. 

 

7. 쉬워 보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영화의 감독 존 바담(John Badham)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달인 중 한 명이다.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1977년), <위험한 게임(War Game)>(1983년), <블루 썬더(Blue Thunder)>(1983년) 등 다수의 흥행작을 만들었다. 업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흥행에 있어선 높은 타율을 자랑하는 감독이었는데 이상하게 지명도가 낮다. 세상은 일을 수월히 해내는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존 바담이 이런 케이스인 것 같다.  

<코 끝에 걸린 사나이>도 관객이 보기에 막힘없이 술술 넘어가, 특별할 것 없는 'Made in Hollywood 공산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디테일하게 이 영화를 뜯어보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프닝 시퀀스에서 모스는 자동차를 운전하며 등장한다. 데이트 약속에 늦기 싫어 액셀을 힘껏 밟지만, '스모킹 건 2'의 대형 입간판을 실은 트레일러에 가로막힌다. 

초반부터 강한 인상을 심어준 대형 입간판은 영화 내내 수시로 등장한다. 이는 클라이맥스 액션 스턴트의 공간적 포석이다.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모스와 닉, 수잔은 차례대로 '코 끝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사실 이 세 주인공은 유사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닉은 수잔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모스는 닉과 수잔이 금세 친해진 것을 질투한다. 셋 사이의 갈등은 대형 입간판 위에서의 절정을 맞는다. 모스가 간신히 매달려 있을 때 수잔이 구해주고, 수잔이 떨어질 뻔할 때 닉이 구해준다. 결정적으로 모스가 위험할 때 닉이 대신 총을 맞는다. 드라마가 액션을 이끌고, 액션이 인물 간의 갈등을 해소한다.

 

8. 무초식의 초식

존 바담의 연출력이 진짜 빛나는 순간은 액션 시퀀스보다 평범한 장면들에 있다. 모스가 닉 랭 때문에 브릭스 반장(딜로리 린도 / Delroy Lindo)에게 달려가 항의하는 장면이 있다. 반장은 닉 랭이 총기 소지를 요구했다는 모스의 고자질에 심각해진다. 닉 랭에게 단호히 한 마디 할 것 같지만, 막상 닉 랭이 찾아와 악수를 건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을 짓는다. 알고 보니 반장은 닉랭의 광팬으로 <스모킹 건 2>의 홍보용 점퍼까지 입고 있었다. 이런 개그씬은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만 과해도 유치해서 못 볼 장면이 된다. 존 바담은 시종일관 적정선을 지키면서 소기의 임무 - 관객의 폭소 유발 - 를 완수한다.

지하철 시퀀스도 칭찬해 주고 싶다. 수잔과 닉 랭은 모스를 빼고, 단 둘이 만나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탄다. 수잔은 모스가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만난 것인데, 닉 랭은 수잔이 자기에게 호감이 있다고 오해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닉 랭이 이래선 안 된다고 수잔에게 선을 긋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수잔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닉 랭은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하필 이때 지하철에 깡패들이 들어와 소란을 일으키고, 닉 랭을 경찰로 알고 있는 수잔이 등을 떠밀어 할 수 없이 깡패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 충돌은 지하철 역에서의 총격전으로 확대된다.

닉 랭이 총을 피하려 기둥에 몸을 숨기는데, 이곳을 미리 선점하고 있는 흑인 여성이 그를 밖으로 밀치는 개그도 효과적이다. 모스 형사가 지하철 역에 찾아와 상황을 해결하는 대목에선 진지한 스릴러 영화처럼 보인다. 길게 이어지는 지하철 시퀀스 안에 액션, 코미디, 스릴러가 다 들어있다. 장르가 왔다 갔다 바뀌는데 그 솜씨가 천의무봉이다. 억지로 기운 자국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9. 알고 보면 흥미로운 정보들

<코 끝에 걸린 사나이>는 북미 기준 1991년 3월 8일에 개봉했다. 걸프전이 한창일 때라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북미 이외 지역에서 선전하여 최종 박스 오피스 매출 65.6백만 불을 기록했다. 참고로 제작비는 24백만 불로 추정된다.

원래는 아서 힐러(Arthur Hiller) 감독에 케빈 클라인(Kevin Kline)과 진 해크만(Gene Hackman) 조합으로 진행되다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장기 연출 계약을 맺은 존 바담이 이 프로젝트를 가져온다. 바담은 트라이스타(Tristar)의 사장을 지내기도 한 젊은 프로듀서 롭 코헨(Rob Cohen)과 함께 의기투합, 바담 / 코헨 그룹(The Badham / Cohen Group)이라는 제작사를 만들었는데, 그 첫 작품으로 <코 끝에 걸린 사나이>를 추진한다. 마이클 J. 폭스가 먼저 오케이를 하고, 그 상대역으로 마이클 우즈를 추천하며 배우 세팅이 마무리된다. 이즈음 폭스가 <백 투 더 퓨쳐> 2 & 3편 촬영에 들어가는 바람에 존 바담은 먼저 멜 깁슨 & 골디 혼 주연의  <전선 위의 참새(Bird on a Wire)>가 창립작이 되었다.

<코 끝에 걸린 사나이>의 촬영 스케줄은 16주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3주나 빨리 마무리했는데, 프로듀서이자 세컨드 유닛 연출을 맡은 롭 코헨의 활약 때문에 가능했다. 롭 코헨은 훗날 액션영화 전문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며 <트리플 X>, <분노의 질주> 등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