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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7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 2부 Filmography & etc 1. 필모그래피 1) 무명시절(1969년~1975년)스탤론은 아무 연줄없이 맨몸으로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다. 전에도 꽤 많은 작품에 출연했는데, 메이저 영화사 작품에선 엑스트라에 가까운 단역이 대부분이고, 주조연 급으로 출연한 작품들은 예외없이 저예산 독립영화, B 무비 등이다. 개봉도 제대로 못하고 잊혀진 영화들이 다수인데, 스탤론이 스타가 된 후 이 영화들이 좀비처럼 창고에서 발굴되어 재개봉되는 특수를 누렸다.1) 제곱근(The Square Root) - 1969년 - 출연2) 키티와 스터드의 파티(The Party at Kitty and Stud's) - 1970년 - 출연3) 비둘기(Pigeons) - 1970년 - 출연4) 바나나 공화국(Bananas) 1971년 - 출연5) 숨을 곳이 없다.. 2025. 2. 14.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 1부 언더 독의 현신 인생은 두고 봐야 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실베스터 스탤론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액션 스타였다. 그의 인기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함께 스탤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냉전시대, 소련에 맞선 '자유' 미국의 히어로로 이미지 메이킹한 게 치명타가 됐다.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도 인기 하락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스탤론의 아류로 평가받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제임스 카메론, 존 맥티어난 등 에이스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그의 인기를 추월했다.  1. 누가 강한 자인가?스탤론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다. 하지만 와 프랜차이즈 외에 흥행한 영화가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다. , 처럼 액션 스타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 적도 있지만, 실패작이 곱절은 더 많다... 2024. 8. 13.
장학우(張學友 / Jacky Cheung Hok Yau) - Discography 1. 첫 번째 성공 장학우의 음악 커리어를 살펴볼 때 가장 첫 번째 단계는 1985년부터 1987년 8월의 최초의 단독콘서트까지로 잡아 볼 수 있다. 불과 3년 만에 6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발표했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대중가수로서 장학우의 위상은 알란 탐, 장국영, 매염방, 진혜한 등에 미치지 못했다. 1) Smile - 1985년 4월2) 요원적타(遙遠的她) Amor - 1986년 1월3) 정무사귀(情無四貴)(國) - 1986년 5월4) 상애(相愛) - 1986년 10월5) 재아심심처(在我心深處)(國) - 1987년 7월6) Jacky - 1987년 7월7) 장학우 '87 연창회 - 1987년 8월  2. 짧은 슬럼프 1988년 1월 발매한 국어 앨범 와 같은 해 3월 공개된 광동어 5집 .. 2024. 6. 15.
장학우(張學友 / Jacky Cheung Hok Yau) - 1부 가신(歌神)이라 불리는 사나이 장학우는 명실상부 중화권 최고의 가수로 꼽힌다. 그의 이름 앞에는 'God of Song', 즉 '가신'이란 타이틀이 붙는다. 인기스타들을 '신', '황제'라 추켜올리는 중화권 매체들의 칭찬 인플레야 유명하지만, 장학우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그의 팬들, 일반 대중, 업계 종사자들의 존경이 담겨 있다. 홍콩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황금기에 데뷔해 1990년대에 유덕화, 곽부성, 여명과 함께 사대천왕으로 불렸지만, 음악계의 기록과 업적에 있어선 압도적인 존재다. 중화권 최고 앨범판매(2003년까지 총 2,500만장) 기록 보유자이며, 홍콩 최초의 창작 뮤지컬 를 직접 만든 장본인이다. 앨범은 발표할 때마다 한 단계 위의 클래스(이 때문에 신작 발매 간격이 갈수록 길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뽐낸다. 노래실력은 또 .. 2023. 8. 15.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3부 젊은 날의 방황 대략 1970년에서 1972년까지 오우삼은 장철 감독 연출부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장철 감독은 동시에 3~4편을 연출하는 등 아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그러니 홍콩 뉴웨이브 감독들이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면, 오우삼의 학교는 쇼 브라더스 스튜디오, 장철 감독의 촬영 현장이었다. 오우삼이 조연출로 정식 크레디트를 받은 작품은 , (1972년), (1972년), (1972년), 그리고 (1973년), 이렇게 4편이다.1. 시네필 모임장철 감독과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다시 씨네필 모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오우삼은 대학에 다닐 형편이 안 되었다. 그는 문화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비인가 기관에서 하는 영화 이론 수업을 들으며 지적 호기심을 채웠다. 이곳에서 홍콩 대학 연합체의 씨네필 모임과 인.. 2023. 6. 5.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2부 빈민가 소년, 열혈 씨네필이 되다 오우삼은 교회가 지원하는 학교를 다녔다.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살던 오우삼에게 교회와 학교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 아버지처럼 따르던 신부님에게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다 고백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너의 영혼은 성직자가 되기에 너무 자유분방하다'며 예술가가 되길 권했다고 한다. 젊은 시네필 1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우삼은 영화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 무렵(1966년부터 1969년 사이) 유럽의 68 혁명의 영향을 받아 홍콩의 젊은이들도 식민지 정부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갔다. 시위와 파업이 끊이질 않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모택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식민지 정부의 무능, 부패, 불안한 치안, 극심한 빈부 격차에서 비롯됐다. 영국 정부가 홍콩의 중국 조기 이양을 검토했을.. 2023. 5. 1.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1부 쌍권총과 비둘기와 우정의 로맨티시트 언제부턴가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그 계기를 되짚어 보면 TV에서 봤던 , 를 비롯한 성룡의 영화들, 그리고 오우삼의 영화가 될 것 같다. 는 아쉽지만 비디오로 봤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오우삼 영화는 이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에 압도된 나머지 통로 계단에 주저앉아 세 번을 더 봤다. 극장을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깔렸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없이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던 그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는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는 실망스러웠지만 에는 또 한번 감탄했다. 그 시절 내게 오우삼은 영화의 신(神)이었다. 할리우드 진출 후 , 를 내놓으며 A급 감독이 되어가는 모습에 내가 키운 것 같은 뿌듯함마저 들었다. 를 정점으로 오우..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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