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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4

장학우(張學友 / Jacky Cheung Hok Yau) - 1부 가신(歌神)이라 불리는 사나이 장학우는 명실상부 중화권 최고의 가수로 꼽힌다. 그의 이름 앞에는 'God of Song', 즉 '가신'이란 타이틀이 붙는다. 인기스타들을 '신', '황제'라 추켜올리는 중화권 매체들의 칭찬 인플레야 유명하지만, 장학우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그의 팬들, 일반 대중, 업계 종사자들의 존경이 담겨 있다. 홍콩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황금기에 데뷔해 1990년대에 유덕화, 곽부성, 여명과 함께 사대천왕으로 불렸지만, 음악계의 기록과 업적에 있어선 압도적인 존재다. 중화권 최고 앨범판매(2003년까지 총 2,500만장) 기록 보유자이며, 홍콩 최초의 창작 뮤지컬 를 직접 만든 장본인이다. 앨범은 발표할 때마다 한 단계 위의 클래스(이 때문에 신작 발매 간격이 갈수록 길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뽐낸다. 노래실력은 또 .. 2023. 8. 15.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3부 젊은 날의 방황 대략 1970년에서 1972년까지 오우삼은 장철 감독 연출부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장철 감독은 동시에 3~4편을 연출하는 아주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었다. 동세대 다른 감독들이 대학에서 영화 연출 공부를 했다면, 오우삼의 학교는 장철 감독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오우삼이 조연출로 정식 크레디트를 받은 작품은 , (1972년), (1972년), (1972년), 그리고 (1973년), 이렇게 4편이다. 시네필 모임 장철 감독과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다시 씨네필 모임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오우삼은 문화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비인가 기관에서 하는 연기, 영화 이론 수업을 들었다. 여기서 영화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함께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더 나아가 실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당시 .. 2023. 6. 5.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2부 빈민가 소년, 열혈 씨네필이 되다 오우삼은 교회가 지원하는 학교를 다녔다.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살던 오우삼에게 교회와 학교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 아버지처럼 따르던 신부님에게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다 고백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너의 영혼은 성직자가 되기에 너무 자유분방하다'며 예술가가 되길 권했다고 한다. 젊은 시네필 1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우삼은 영화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 무렵(1966년부터 1969년 사이) 유럽의 68 혁명의 영향을 받아 홍콩의 젊은이들도 식민지 정부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갔다. 시위와 파업이 끊이질 않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모택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식민지 정부의 무능, 부패, 불안한 치안, 극심한 빈부 격차에서 비롯됐다. 영국 정부가 홍콩의 중국 조기 이양을 검토했을.. 2023. 5. 1.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1부 쌍권총과 비둘기와 우정의 로맨티시트 언제부턴가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그 계기를 되짚어 보면 TV에서 봤던 , 를 비롯한 성룡의 영화들, 그리고 오우삼의 영화가 될 것 같다. 는 아쉽지만 비디오로 봤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오우삼 영화는 이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에 압도된 나머지 통로 계단에 주저앉아 세 번을 더 봤다. 극장을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깔렸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없이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던 그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는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는 실망스러웠지만 에는 또 한번 감탄했다. 그 시절 내게 오우삼은 영화의 신(神)이었다. 할리우드 진출 후 , 를 내놓으며 A급 감독이 되어가는 모습에 내가 키운 것 같은 뿌듯함마저 들었다. 를 정점으로 오우..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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