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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2부 빈민가 소년, 열혈 씨네필이 되다

by homeostasis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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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은 교회가 지원하는 학교를 다녔다.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살던 오우삼에게 교회와 학교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 아버지처럼 따르던 신부님에게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다 고백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너의 영혼은 성직자가 되기에 너무 자유분방하다'며 예술가가 되길 권했다고 한다.

젊은 시네필

16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오우삼은 영화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그 무렵(1966년부터 1969년 사이) 유럽의 68 혁명의 영향을 받아 홍콩의 젊은이들도 식민지 정부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갔다. 시위와 파업이 끊이질 않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모택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식민지 정부의 무능, 부패, 불안한 치안, 극심한 빈부 격차에서 비롯됐다. 영국 정부가 홍콩의 중국 조기 이양을 검토했을 만큼 혼란의 시대였다. 훗날 오우삼은 <첩혈가두>에서 이 시기의 홍콩을 간접적으로나마 묘사한다.

분노와 반항의 시대에 오우삼은 프랑스 누벨바그에 심취한다. 프랑스 젊은 감독들은 스스로를 작가라 선언하며,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적은 돈으로도 훌륭한 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고, 누벨바그의 성공은 오우삼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오우삼은 영화 서적을 탐독해 가며 영화 이론을 공부했고, 뜻 맞는 동지들과 힘을 모아 8mm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대학가에서 유명했던 시네필 모임(정작 오우삼 자신은 대학 진학을 못했다)의 일원이 되었다. 훗날 명보(明報)에 영화평론을 기고했던 석기(石琪 / Sek Kei)가 이 모임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석기는 학생 영화 운동 모임을 주도하며 이후 홍콩 영화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데 2023년 홍콩 금상장 조직위원회는 석기에게 Professional Achievement Award를 수여한다.

23년 홍콩금상장 박업정신상 수상자 포스터

사결(死結 / Dead Knot)

2000년에 홍콩 필름 아카이브는 오우삼이 각본, 주연, 제작을 맡고 석기가 연출한 실험영화 <사결>의 16mm 필름을 발견해 복원·상영한다. 지금 구글이나 유튜브에 '死結 1969'로 검색하면 이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 약 17분 분량의 이 작품은 대사 없이 8개의 짧은 챕터로 구성된 흑백 단편으로 오우삼은 한 남자와 사도 마도히즘적 관계를 나누는 인물로 나온다. 옷을 벗은 두 남자가 서로의 몸을 만지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나체의 오우삼을 여러 가지 물건으로 때린다. 오우삼이 연기한 남자는 선글라스 남자에게서 도망쳐 한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방황 끝에 여인은 사라지고 오우삼은 다시 선글라스 남자에게 돌아간다. 재미있는 것은 청년 시절 찍은 작품에 교회와 십자가, 구원을 상징하는 하얀색, 그리고 비둘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직업 영화인

1960년대 후반 홍콩 영화 산업은 쇼브라더스(邵氏兄弟)와 케세이(國際電影)의 양강 체제에서 쇼브라더스의 독주로 이행되던 시기였다. 쇼브라더스는 호금전의 <대취협>, 장철의 <독비도> 등을 앞세워 사세를 확장했다. 쇼 브라더스가 '라이벌' 케세이의 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 들이자, 케세이는 젊은 영화학도들에게 문호를 연다. <사결> 같은 실험영화를 만들던 오우삼은 1969년, 케세이에 입사하여 스크립터로 영화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케세이는 영화제작 중단을 선언한다. 오갈 곳 없던 오우삼은 지인의 추천으로 쇼브라더스의 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 연출부에 합류하게 된다. 왕우와 결별한 장철이 적룡-강대위를 주축으로 진관태, 왕종 같은 젊은 남자 배우들과 영화를 찍고 있을 때였다. 왕우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외로운 영웅이었다면, 70년대 초중반의 장철 영화는 남성 연대의 결성, 유대, 해체에 집중했다. 이는 오우삼이 훗날 연출하게 될 영화에 그대로 이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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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쌍권총과 비둘기와 우정의 로맨티시트 1부

언제부턴가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그 계기를 되짚어 보면 TV에서 봤던 , 를 비롯한 성룡의 영화들, 그리고 오우삼의 영화가 떠오른다. 는 아쉽지만 비디오로 봤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오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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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3부 젊은 날의 방황

대략 1970년에서 1972년까지 오우삼은 장철 감독 연출부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장철 감독은 동시에 3~4편을 연출하는 아주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었다. 동세대 다른 감독들이 대학에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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