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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오우삼(吳宇森 / John Woo Yu-Sen) : 1부 쌍권총과 비둘기와 우정의 로맨티시트

by homeostasis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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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그 계기를 되짚어 보면 TV에서 봤던 <타워링>, <프로젝트A>를 비롯한 성룡의 영화들, 그리고 오우삼의 영화가 될 것 같다. <영웅본색1,2>는 아쉽지만 비디오로 봤다. 극장에서 본 최초의 오우삼 영화는 <첩혈쌍웅>이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에 압도된 나머지 통로 계단에 주저앉아 세 번을 더 봤다. 극장을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깔렸고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없이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던 그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첩혈쌍웅 포스터

<첩혈가두>는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종횡사해>는 실망스러웠지만 <첩혈속집>에는 또 한번 감탄했다. 그 시절 내게 오우삼은 영화의 신(神)이었다. 할리우드 진출 후 <브로큰 애로우>, <페이스 오프>를 내놓으며  A급 감독이 되어가는 모습에 내가 키운 것 같은 뿌듯함마저 들었다. <미션 임파서블 2>를 정점으로 오우삼은 내리막을 걸었다. 한때 우리가 매혹됐던 쌍권총과 비둘기와 과장된 액션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갔다. 최근작 <맨헌트>는 이런 평가에 결정타를 날렸다. 이 시점에 다시 한번 물어본다. 그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대중의 취향이 바뀐 걸까? 나는 오우삼 영화를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그의 영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다시 한번 오우삼의 영화를 돌아보기로 한다.

전쟁과 재해 속에 태어난 아이

오우삼은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집안 전체가 기독교를 믿었는데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오우삼의 아버지는 식구와 함께 홍콩 이주를 결심한다. 이때 오우삼의 나이는 4살. 오우삼의 가족에게 홍콩에서의 삶은 혹독함 그 자체였다. 본토에서 넘어온 이주민들 상당수는 삼수이포 산등성이에 형성된 판자촌에 기거했는데 1953년 12월 25일 추운 겨울밤 대화재가 발생해 마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다. 이 화재로 5만 3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당시 홍콩 인구의 2%에 해당했다. 오우삼 가족도 이때 집을 잃고 1년 넘게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살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는 결핵에 걸려 몸져눕는다.

어머니와 오우삼, 그리고 영화

가장이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자 어머니가 공사판에서 돌 나르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년 간의 노숙 생활 끝에 가족은 새로 지은 공동 주거지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오우삼은 그의 아버지를 닮아서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반면 그가 살던 공동 주거지는 야만의 공간이었다. 오우삼은 이곳에서 온갖 폭력에 노출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11살 때 살인을 목격했다고 밝힐 정도로 거친 환경에서 살았다. 외출할 때,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 언제나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손에 쥐고 다녔다고 한다.

희망없는 일상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가던 영화관이었다. 오우삼은 삼수이포의 어두운 극장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 특히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 켈리가 나오는 뮤지컬에 매혹됐다. 서구 비평가들은 오우삼의 총격전 장면을 마치 우아한 댄스 동작 같다며 '발레'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이런 액션 시퀀스를 만들게 되었냐는 질문에 오우삼은 어린 시절 보았던 뮤지컬의 영향이라 밝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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