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두고 봐야 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실베스터 스탤론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액션 스타였다. 그의 인기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소련 붕괴와 함께 스탤론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냉전시대, 소련에 맞선 '자유' 미국의 히어로로 이미지 메이킹한 게 치명타가 됐다.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도 인기 하락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스탤론의 아류로 평가받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제임스 카메론, 존 맥티어난 등 에이스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그의 인기를 추월했다.
1. 누가 강한 자인가?
스탤론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다. 하지만 <록키>와 <람보> 프랜차이즈 외에 흥행한 영화가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다. <클리프 행어>, <데몰리션 맨>처럼 액션 스타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 적도 있지만, 실패작이 곱절은 더 많다. 라이벌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벤치마킹해 <오스카>, <엄마는 해결사> 같은 코미디 영화 출연도 해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이러니한 게 커리어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록키 발보아'와 '존 람보' 캐릭터였다. <록키>(1976년)는 무명의 스탤론을 할리우드의 골든보이로 만들었다. <람보 2>(1985년)는 스탤론을 세계 최강 액션 히어로로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 한물 간 배우 취급받던 스탤론이 다시 메인스트림으로 돌아오게 한 작품은 무려 6번째 록키를 연기한 <록키 발보아>(2006년)였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도 록키의 신화는 계속되었다. 신예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크리드>로 '록키'를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이 작품은 21세기에도 록키의 성공신화가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스탤론은 <크리드>1&2편까지 도합 8편의 영화에서 록키 발보아를 연기했다.
2024년 기준, 실베스터 스탤론은 78세가 됐다. 라이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는 동안, 스탤론은 한 눈 팔지 않고 쉼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찍고 있다. 이제 영화 경력으로 따지면 아놀드는 스탤론의 라이벌이 될 수 없다. 스탤론이 한참 위다. 역시 인생의 승자는 끝까지 버티는 자다.
2. 성장기
실베스터 스탤론은 1946년 7월 6일, 악명 높은 뉴욕의 헬스키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계 프란체스코 스탤론, 어머니는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는 재클린 스탤론이다. 아버지는 헤어 디자이너였고, 어머니는 댄서 출신에 나중에는 여자 레슬링 프로모터로도 일했다. 넓은 의미로 양친 모두 쇼 비즈니스 업계에 종사했다 봐도 큰 무리는 없겠다. 스탤론이 태어날 때 의사가 겸자를 잘못 써서 얼굴 왼쪽 아래 신경이 손상됐다는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이 때문에 배우로서 치명적인 단점 - 어눌한 말투와 쳐진 얼굴 - 을 갖게 되었다. '실베스터'라는 이름이 싫어 본인 스스로 'Sly'라는 애칭을 지어 불렀다
반항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세가 되기 전에 무려 14개 학교에서 폭력, 반 사회적 행동 등을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공부는 싫어했지만, 운동과 연기는 좋아했다. 이것이 스탤론의 인생을 구원했다. 필라델피아의 링컨 하이스쿨 - 노트르담 아카데미 - 심지어 군사 학교에서 잠깐 지내기도 했고, 대학은 마이애미의 데이드 칼리지, 스위스의 아메리칸 칼리지로 유학,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마이애미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스탤론은 한 인터뷰에서 어릴 때 하도 배를 자주 곯아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밝힌 적이 있다. 그만큼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학교를 끝까지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열성 때문이었다.
3. 내가 록키고, 록키가 나다!!
무비 스타가 되겠다 마음먹은 스탤론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간다. 열정 하나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무명 시절 소프트 포르노에 출연한 건 유명한 일화인데, 당시 출연료는 200불이었다고 밝혔다. 배우보다 시나리오 작가 쪽이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흥행에도 다소 성공했던 <브루클린의 아이들(The Lords of Flatbush>로 크레디트를 처음 받는다.
스탤론은 배우 지망생 사샤 체크(Sasha Czack)를 만나 결혼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스탤론은 20대의 시간 전부를 무명 배우로 보냈다. 사샤는 웨이트리스, 스탤론은 동물원 청소, 극장 경비원 - 주급 36달러를 받았다고 -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배우의 꿈을 놓지 못했다.
1975년 3월 24일, 스탤론은 인기 절정의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방어전 시합을 보러 간다. 상대는 평범한 전적의 선수 척 웨프너(Chuck Wepner)였다. 알리가 가볍게 이길 거라 모두가 예상했지만, 척 웨프너는 집념을 선보이며 시합을 15라운드까지 가는 난타전으로 이끈다. 이 시합에 영감을 받은 스탤론은 3일 하고 20시간 동안 <록키>의 초고를 완성한다. 이때부터 스탤론에게 일어난 일은 기적의 연속이다. 이 시나리오의 가치를 알아본 제작자가 나타났고, 스탤론은 '록키'역을 직접 연기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끝내 관철해 냈다. 1976년 11월 <록키>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록키>를 보고 나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차세대 말론 브란도가 될 수 있다며 극찬을 했고, 프랭크 카프라는 '지난 10년간 나온 영화들 중 최고'라고 칭찬했다. 업계의 극찬 세례가 오스카 캠페인에 불을 댕겼다 이듬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을 거머쥐었고, 스탤론은 하루아침에 할리우드의 총아로 주목받는다..
4. '80s 전성기 → '90s 방어전
<록키>로 스타가 된 스탤론!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야심 차게 작업한 영화는 실패하고, 그 실패를 만회하려 찍은 <록키 2>는 성공한다. 그다음 작품은 또 실패. <록키 3>로 다시 성공하는 패턴이 만들어졌다. 이런 딜레마에서 탈출하게 만든 영화가 바로 1982년작 <람보>였다. 스탤론 영광의 시절은 1985년이다. 그해 여름, <람보 2>로 세계 최고 액션 스타로 등극하고, 가을에 <록키 4>로 자유 미국을 대표하는 전사(戰士)로 우뚝 - 이 영화에서 록키는 소련의 권투 영웅 드라고와 맞짱을 뜬다 - 선다.
이 무렵 스탤론은 조강지처 사샤와 이혼을 한다. 사샤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록키 5>에서 아들을 연기했던 장남 세이지가 36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차남 시어저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세상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캐논 그룹과 손잡고 만든 영화들의 잇단 흥행 실패, 액션 영화의 트렌드 변화(1988년에 나온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는 스탤론과 비교하면 일반인의 몸), 아놀드 슈워제네거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 맞물려 스탤론은 점점 과거의 유물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람보 2>가 나온 지 불과 3년 뒤, 1988년에 개봉한 <람보 3>에서 람보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과 손잡고 소련에 맞선다. 지금 와서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1년 후에 소련이 붕괴하고, 베를린 장벽도 무너진다. 스탤론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벤치 마킹하여 <오스카>, <엄마는 해결사> 같은 코미디에도 출연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고, 믿었던 <록키 5>마저 흥행에 참패한다.
90년대 스탤론의 커리어는 뚜렷한 하락세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액션이 강조된 영화를 찍었는데, <클리프 행어>, <데몰리션 맨> 같은 흥행작과 <저지 드레드>, <어쌔신> 같은 실패작을 진자처럼 오갔다. 90년대 후반이 되면 단독 주연작이 극장 개봉을 못하고 비디오 렌털 시장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스탤론은 과거의 영광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한물 간 배우 취급을 받았다.
1997년 5월, 스탤론은 제니퍼 플래빈(Jennifer Flavin)과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제니퍼는 세 딸(소피아, 시스틴 로즈, 스칼렛)을 낳았는데, 스탤론의 딸 사랑은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다. 제니퍼 플래빈은 2022년 스탤론과 이혼을 발표했다가 다시 번복한다.
5. 다시 타오르는 불꽃
2005년, 실베스터 스탤론이 그 시절 챔프, 슈가레이 레너드와 NBC 방송국의 권투 서바이벌 프로그램 <컨텐더> 호스트가 된 걸 보고 이젠 정말 추억의 배우가 됐구나 했었다. 60살이 다 된 그가 시리즈의 여섯 번째 <록키 발보아>를 제작한다는 소문에 정말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영화는 뜻밖의 감동을 선사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렇게 스탤론은 다시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으로 당당히 복귀한다.
불꽃처럼 재기에 성공한 그는 <람보 4>를 제작하며 본인의 손으로 본인의 프랜차이즈를 마무리하는 대정정에 돌입한다. <람보 4>는 <록키 발보아>만큼 잘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8~90년대 액션 스타들을 불러 모아 람보의 평행 우주 같은 스토리의 <익스펜더블>을 만든다. 이 작품은 액션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4편까지 이어진다.
2015년에는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이 아버지의 라이벌 록키를 찾아와 그에게 권투와 인생을 배운다는 내용의 록키 스핀오프 <크리드>를 발표한다. 노인이 된 록키를 감동적으로 연기한 스탤론은 전미 비평가 협회,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거머쥔다. 커리어 내내 최악의 영화에 주는 골든 래즈배리의 단골 수상자였던 그가 끝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도 노년이 되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스탤론은 슈워제네거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재선 캠페인 때도 적극 참여했다.
정글과도 같은 영화판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스탤론은 영화 제작의 어려움을 여러 차례 토로했다. "영화 한 편은 3~4백 명 정도 되는 제작진의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영화 제작은 거대한 협상 테이블이며, 이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습니다. 일단 제작에 돌입하면 원래 의도의 40% 정도만 반영되어도 성공한 것입니다. 파이낸싱에서 배우들의 연기 방식까지도 영향을 줍니다. 감독이 촬영 당일 제대로 못해서 전체 포인트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탤론은 그의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고, 성공과 실패를 오갔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현역으로 필모그래피를 계속 늘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블과 DC영화에 모두 출연했고, <이스케이프 플랜>이라는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론칭하고, <람보>의 다섯 번째 영화도 찍었다. 처음 참여한 OTT 미니시리즈 <털사 킹>은 시즌 2까지 순항 중이다. 일흔이 넘어서도 스탤론은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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