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로열>부터 <노 타임 투 다이>로 끝난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무비들은 과거의 007 시리즈를 해체하여 보다 진지한 영웅 서사로 거듭나려 했다. 21세기에도 프랜차이즈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일종의 '역사 전쟁'과도 같은 작업이었다. 007 시리즈는 최초 <살인번호>부터 남성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뻔뻔한 오락영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 정체성 확립
<살인번호>는 1962년 기준으로 잘 만들어진 엔터테인먼트다. 본드가 자메이카에 도착하는 영화의 1/3 지점까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유려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처음 본드가 등장하는 카지노 시퀀스는 그중에서도 백미다. 만만치 않은 상류층 여자와 멋진 슈트빨의 농익은 남자가 서로를 희롱한다. 주연을 맡은 숀 코너리는 능숙한 사내를 능숙하게 연기한다. 위험해 보이고, 그래서 섹시하다. 영화에서 최고의 순간은 액션 장면이 아니라 숀 코너리와 여자 배우들 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차례의 음란한 대화들이다.
제임스 본드는 젠틀맨의 표본처럼 보이지만 영국 정부 소속의 킬러이며, 목적을 위해 여자를 도구처럼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냉혹한 사나이다. 여자 앞에서 기 죽는 법이 없고, 그녀들이 원하는 성적인 만족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자다. 감독 테렌스 영과 숀 코너리가 해석한 제임스 본드는 이안 플레밍의 소설과 다른, 고유한 캐릭터가 됐다. 이처럼 <살인번호>는 21세기까지 계속될 프랜차이즈의 출발점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많은 부분들이 공식이 되어 후속편에서 반복, 재활용되었다. 건 배럴 시퀀스,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 M의 브리핑과 비밀 무기 소개로 이어지는 루틴, 해외 로케이션, 글래머러스한 본드 걸의 등장은 이후로도 계승-발전하게 된다. 몬티 노먼이 작곡하고 존 베리가 편곡한 제임스 본드 테마도 빼놓을 수 없다.
2. 저개발의 기억
<살인번호>는 자메이카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화 속 악당 Dr.No가 인근 공해상 무인도를 사들여 비밀 과학 기지를 지었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를 여러 차례 봤지만, 현재 VOD로 볼 수 있는 <살인번호> 리마스터링 버전은 과거 비디오 테이프의 화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다. 영화의 재미가 배가 되는 것을 뛰어넘어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메이카의 파란 하늘과 풍경들은 그 자체로 영화의 큰 재미다.
이 영화가 개봉할 무렵만 해도 자메이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화에는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국 총독부가 존재하고, 본드가 방문하는 호텔과 고급 클럽은 모두 영국인 전용이다. 이 영화를 볼 때 자메이카가 영국 식민지라는 것을 알고 볼 때와 모르고 볼 때는 감상이 완전 다르다. 007 시리즈는 <살인번호> 이후에도 적당한 관광지를 찾아 전 세계를 누볐다. 대중들은 자국에 대한 왜곡만 없다면 아무 문제의식 없이 본드의 시선을 따라 이국적 풍경을 즐긴다. 한국 관객들은 <007 어나더데이>를 통해 본드 무비가 얼마나 무례한가 체험할 수 있었다.
3. 함정
영화의 후반부는 '메인 빌런' 닥터 노의 비밀기지에서 진행된다. 이 세트는 천재 켄 아담스가 디자인했는데, 이후로 신기한 악당 기지가 시리즈의 전통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007 영화는 더 크고, 더 기묘한 디자인의 악당기지를 선보였는데, 여기서 이상한 공식 하나가 탄생한다. 이른바 '악당 기지 - 영화적 재미 반비례의 법칙'이 그것이다. 클라이맥스가 악당기지에서 펼쳐질 때, 영화의 힘이 급격히 빠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007 시리즈는 거대 기지를 보여주되 이 함정에서 빠지지 않으려는 투쟁의 역사로도 파악할 수 있다.
<살인번호>를 비롯, 루이스 길버트가 연출한 <두 번 산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 <문레이커>가 거대 기지의 함정에 빠진 대표적 케이스고, 시리즈 중 최고로 평가 받는 <위기일발>, <유어 아이즈 온리>, <옥토퍼시>, <살인면허>, <카지노 로열>에서는 악당 기지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스카이 폴>, <스펙터>, <노 타임 투 다이>는 악당 기지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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