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나 선생의 첫 정규앨범 <프롤로그 서막>은 싱글 <슬로모션> 발매 두 달 뒤인 1982년 7월 2일 출시됐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베리에이션 변주곡>, 83년 3월 <판타지 환상곡>의 트릴로지가 완성된다. 사실상 데뷔 앨범을 세 장 낸 것과 같다.
일단 사운드가 훌륭하다. 1982년에 나온 한국의 가요 앨범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월등하다. 오케스트라, 브라스, 오카리나 등 쓰고 싶은 악기는 모조리 갖다 쓴 느낌이다. 앨범은 크게 봐서 청춘영화의 한 장면이 즉각 연상되는 발라드, 미디어 템포의 곡들이 하나로 묶이고, 다른 쪽은 도발적인 가사가 탑재된 락, Funk 기반의 댄스곡이 차지한다. 참여한 뮤지션들도 쟁쟁하다. 당대의 히트메이커 키스기 타카오(来生たかお)에서 건반 연주자 츠키야마 에리코(塚山エリコ) 같은 신인 작곡가도 악곡을 제공했다.
17살의 신인가수 나카모리 아키나는 많은 자본이 투입된 데뷔 앨범에서도 자기만의 색깔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슬로모션>의 풋풋한 보컬이 <본 보야지>에선 능숙하고 여유로운 노래를 들려주고, <조건반사>는 도발적인 느낌으로, <당신의 포트레이트>는 기교없이 스트레이트하게 음을 뽑아낸다. 아키나의 강점은 곡 해석과 보컬 연기에 있다. 남이 쓴 가사라도 본인만의 해석으로 부르니 자기 이야기처럼 노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로그 서막> 앨범은 나카모리 아키나가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아티스트였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1. 당신의 포트레이트(あなたのポートレート)
작사 : 키스기 에츠코(来生えつこ) / 작곡 : 키스키 타카오(来生たかお) / 편곡 : 하기타 미츠오(萩田光雄)
인트로의 장엄함은 한 소녀의 덕통사고(?)를 운명적인 사건으로 만든다. 나카모리 아키나의 보컬은 감정이 비어 있는 듯 해 오히려 오만가지 사연이 담긴 듯한 느낌을 준다. 가사가 재미있다. 남자의 살짝 웨이브 진 앞 머리에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프리 코러스의 아찔한 전조, 후렴의 위력을 증폭하는 백 보컬의 멜로디 라인, 브리지의 건반 솔로가 히트를 예감케 한다. 이 곡은 데뷔 싱글의 유력한 후보곡 중 하나였으나 <슬로 모션>에 밀려 두 번째 싱글 곡으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발매 직전 <소녀A>에 밀린다. 노래마다 타고난 팔자가 있다는 속설을 생각나게 한다.
2. Bon Voyage
작사 : 시노즈카 마유미(篠塚満由美) / 작곡 : 츠키야마 에리코(塚山エリコ) / 편곡 : 오타니 카즈오(大谷和夫)
시티 팝 <본 보야지>는 찰랑이는 리듬 기타, 삼바 풍, 여름에 제격인 멜로디로 청량감을 준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신인 답지 않은 능숙한 보컬을 선보이는데, <당신의 포트레이트>의 청춘 로맨스 감성보다 이쪽이 훨씬 더 맞는 옷이다. 세 번 등장하는 기타 솔로는 카시오페아, T스퀘어, 혹은 봄여름가을겨울을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3. 이마쥬의 그늘(イマージュの翳り)
작사 : 시노즈카 마유미 / 작곡 : 사세 슈이지(佐瀬寿一) / 편곡 : 하키타 미츠오
놓쳐버린 사랑에 아쉬워 하는 마음을 노래한 마이너 발라드. 수록곡들이 공통사항이기도 한데 솔로 연주로 브릿지 구간을 채운다. 이 곡 역시 브릿지의 키보드 솔로가 인상적인 멜로디를 들려준다.
4. 조건반사(条件反射)
작사 : 나카자토 츠즈루(中里綴) / 작곡 : 미무로 노부로(三室のぼる) / 편곡 : 후나야마 모토키(船山基紀)
전성기의 <Desire> , <Tattoo> 같은 트랙이 저절로 나온 게 아니다. 시건방지게 부르는 아키나의 보컬에 주목하길!!
5. T셔츠 선셋(Tシャツ・サンセット)
작사 : 나카자토 츠즈루 / 작곡 : 타야마 마사미츠(田山雅充) / 편곡 : 후나야마 모토키
항구, 바다, T셔츠, 땀에 젖은 머리칼...청춘이다. 이 곡의 보컬은 <조건반사>, <슬로모션>과 또 다르다. 마야, 잉카 문명이 연상되는 이국적인 느낌은 편곡자 후나야마 모토키의 솜씨! 후나야마 모토키는 무려 2,700여곡의 편곡에 참여한 일본 음악계의 레전드로 이 앨범에서 4곡을 어레인지했다.
6. 은하전설(銀河伝説)
작사 : 시노즈카 미유미 / 작곡 : 사세 슈이지 / 편곡 : 후나야마 모토키
박진감 있는 신시사이저가 딱 80년대 바이브다. 제목 때문에 SF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계열이 아니다. '얼굴만 보는 사랑은 이제 졸업'이라며 뜨거운 욕망의 순간을 '은하전설'에 비유했다. 수록곡들의 가사 수위가 장난이 아니지만, 나카모리 아키나는 그 욕망을 본인이 주도한다는 인상을 준다.
7. 슬로모션(スローモーション)
작사 : 키스기 에츠코 / 작곡 : 키스기 타카오 / 편곡 : 후나야마 모토키
※ 곡의 리뷰는 포스트 맨 아래 '슬로모션(싱글)' 참조
8. A형 멜랑코리(A型メランコリー)
작사 : 나카자토 츠즈루 / 작곡 : 타야마 마사미츠 / 편곡 : 하기타 미츠오
기타 리프 다음 브라스가 터지면 익숙한 트로트 멜로디가 흥을 돋운다. 건방진 목소리와 리듬 기타. 한국 가수가 불렀다면 노래방 애창곡이 됐을 법 하다. 8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혈액형 성격 분석을 소재로 삼았다.
9. 한 조각의 에메랄드(ひとかけらのエメラルド)
작사 : 사토 아리스(佐藤ありす) / 작곡 : 오노 유지(大野雄二) / 편곡 : 오타니 카즈오
<루팡 3세>로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오노 유지의 곡으로 이별 후에 과거의 사랑을 돌아보는 내용의 마이너 발라드다. 평범하면서도 몽환적 사운드, 특히 후반부의 사이키델릭한 연주가 뜻밖의 즐거움을 준다.
10. 다운타운 스토~리~(ダウンタウンすと〜り〜)
작사 : 다테 아유미(伊達歩) / 작곡 : 요시노 후지마루(芳野藤丸) / 편곡 : 오타니 카즈오
<A형 멜랑코리>와 비슷한 계열의 댄스 넘버. 동거를 시작하게 된 청춘남녀의 열정이 노래의 주제다. '츳파리(불량소녀)' 노선의 예고편 격이다.
Chronicle - 나카모리 아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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