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숨죽여 울던 1980년, 언제부턴가 라디오에선 <창 밖의 여자>가 자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이 우울한 노래는 금세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활동 금지 가수였던 그는 순식간에 슈퍼스타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위대한 탄생'이다. 1980년대가 조용필에게 부여한 미션은 전(全)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가수'였다. 그는 민요, 트로트, 락, 댄스, 동요 등 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곡을 불러야 했다. 지구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처음 발표한 1집 앨범은 그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1. 창 밖의 여자
작사 : 배명숙 / 작곡 : 조용필 / 편곡 : 조용필
'가왕' 조용필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곡. 사람들은 이 노래를 말할 때 비극적 멜로디, 가사, 조용필의 압도적인 가창력을 거론한다. <창 밖의 여자>의 진면목은 곡 전체의 구성, 설계, 악기 배치와 같은 편곡에 있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암울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노래가 메가 히트곡이 된 사례를 <창 밖의 여자> 말고 또 있을까? 이 부분이 놀랍다.
클래시컬한 피아노 연주로 서두를 여는 <창 밖의 여자>는 뒤에서 묘하게 신경을 긁는 듯한 키보드가 없었다면 평범한 발라드였을 것이다. 벌스 '그대는 가로등 되어 내 곁에 머무네'에서 키보드는 히스테릭하게 변하고,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드럼이 후렴의 폭발을 준비한다. 조용필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절규(락커의 거친 탁성과 트로트 창법 사이의 어디쯤)할 때, 예상치 못한 피아노 솔로에 소름이 돋는다. 간주의 기타 솔로도 기가 막힌다. 락 발라드의 공식 같은 연주가 아니다. 오히려 톤을 낮춰 울음을 참는 듯이 흐느낀다. 두 번째 후렴 반복에선 모든 악기가 한꺼번에 휘몰아치고, 이것이 잦아들 때 사이키델릭한 기타와 키보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진다.
2. 돌아와요 부산항에
작사 / 작곡 : 배선우
조용필에게는 애증의 노래다. 1972년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을 통해 처음 발표했을 때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안치행이 소위 '트로트 고고' 스타일로 재편곡한 1976년 버전이 대박을 치며 조용필은 일약 전국구 가수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곧바로 대마초 파동에 휘말리며 가수활동을 접은 채 이민을 결심할 정도로 절망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1집에 실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편곡과 창법이 이전의 것들과 완전히 다르다. 가사와 노래는 슬픈데, 사운드는 디스코텍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짱짱했던 미성은 담배 세 갑은 피고 부른 듯한 허스키 창법으로 변했다. 샤프트(shaft) 주법이라 불렸던 펑키한 기타 리프가 곡 전체를 관통하고, 뱃고동 소리를 흉내 낸 듯한 건반 리프를 전주에 삽입했다.
3. 잊혀진 사랑
작사 : 김중순 / 작곡 : 김희갑
노래 첫 소절의 가사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며 잡았었는데'는 너무나 유명하다. 콘서트에서 올드팬을 위한 히트곡 메들리에 항상 선곡되는 노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마찬가지로 가사는 슬픈데 음악은 댄스다. 뱃고동 소리가 이 곡의 전주에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인상적인 건반 리프 두 개가 빠른 리듬과 함께 '흥'을 높인다.
4. 돌아오지 않는 강
작사 : 배명숙 / 작곡 : 임택수 / 편곡 : 안치행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이별의 처절한 고통을 노래한 트로트 발라드다. 이 곡 역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조용필의 트로트가 유독 다르게 들리는 것은 리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럼 연주가 편곡의 중심이다. 후렴 직전의 드럼 연주는 락 발라드의 문법과 같다. 그리고 창법! 트로트 특유의 꺾기도 아니고, 완전 락 창법도 아니다. 두 가지가 묘하게 섞였다. 한 발짝만 옆으로 가면 조 카커 같은 소울 보컬의 느낌도 있다.
5. 정
작사 : 조남사 / 작곡 : 김학송
쭉 뻗는 후렴의 보컬, 비련의 감정, 통속적이지만 느낌 충만한 가사로 인기를 끌었다. 베이스와 드럼이 중심이 된 리듬 파트는 다른 멜로디의 기타, 건반 연주가 더해지면 소울로 바뀔 것만 같다.
6.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칼로 베는 듯한 날카롭고 애절한 절규. 조용필은 1971년 나훈아가 발표한 <마지막 한마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시 불렀다. 하지만 보컬에 있어서만큼은 나훈아 쪽이 훨씬 흥미롭다.
7. 단발머리
작사 : 박건호 / 작곡 : 조용필 / 편곡 : 조용필
인트로는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최고의 편곡이 아닐까.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번갈아 등장하다 그 유명한 '뿅뿅' 전자음과 합쳐 치며 사운드의 청량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보컬은 또 어떠한가. <창 밖의 여자>에선 절창을 토해내더니, <단발머리>는 비지스 풍의 가성이다. 펑키한 리듬 기타, 인상적인 신시사이저 리프, 많은 악기를 동원하지 않아도 꽉 찬 듯한 사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편곡, 보컬, 가사, 어느 하나 뒤쳐지는 데가 없다. K팝의 클래식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 <단발머리>
8. 한오백년
작사 : 미상 / 작곡 : 미상 / 편곡 : 조용필
앨범의 A, B면 타이틀을 제외하고 <한오백년>이 가장 주목해야 할 트랙이다. 1절은 익숙한 민요다. 간주부터 미 8군 시절부터 조용필의 주요 레퍼토리 <Lean me on>의 느낌이 스며들며 민요와 소울을 왔다 갔다 한다. 그러고 보니 조용필은 언제나 자신이 듣고 열광했던 서구 팝과 한국인의 감성을 음악이란 용광로 속에 녹여내는 뮤지션이었다.
9. 대전블루스
조용필의 <대전블루스>는 너무 비장하다. 1절 후렴가사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를 처절하게 부른다.
10. 너무 짧아요
작사 : 윤철 / 작곡 : 조용필 / 편곡 : 조용필
슬픈 것도, 경쾌한 것도 아닌 멜로디에 미디엄 템포. 벌스는 대중가요인데 건반 연주가 날뛰는 간주를 들으면 록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11. 슬픈 미소
작사 : 유현종 / 작곡 : 조용필 / 편곡 : 조용필
성인 취향의 트로트곡이지만 이 노래 역시 한 발짝만 틀면 80년대 후반 유행한 마이너 발라드가 될 수 있다. 키 포인트는 건반 리프. 조용필의 노래는 확실하게 귀에 감기는 리프가 있다. 그런데 이건 로큰롤의 작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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