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속에서 Part 4
이번 챕터는 '시네마의 선동장치'라는 제목으로 신문이나 잡지 등에 투고된, 비교적 짧은 글들을 모아 놓았다. 그래서 앞에 소개된 글들보다 가볍고, 유머가 살아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에 대한 비평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일본의 1980년대 영화문화가 어떠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마치 미국의 6~70년대, 그리고 한국의 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던 것처럼 일본의 경우는 1980년대였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어려운 글로 가득 차 있던 <키노> 같은 잡지가 통산 99호까지나 발간할 수 있었던 시절.. 그때의 영화 매니아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8) 시네마의 선동장치
#1 진정으로 위대한 시네아스트라면 누구나 잠재적인 희극영화 감독이다(1980년)
스필버그의 <1941>을 보고 하스미 선생이 화가 단단히 났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스필버그가 존 포드, 하워드 훅스 등 위대한 시네아스트의 영향을 받았다며 일종의 정통성을 내세웠는데 <1941>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필버그의 잠재성을 인정한 거다. 하스미 선생은 '존재의 육체적인 표층과 외계의 구체적인 표층의 충돌과 갈등을 그리면 희극, 존재의 심층과 외계의 추상적 심층의 공감과 조화가 비극'이라 정의하며 '잠재적인 희극영화 작가만이 참으로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2 살의가 넘치는 영화관에서 살인이 펼쳐지지 않는, 그 영화적 모순에 대하여(1980년)
스즈키 세이준의 <치고이르바이젠>을 보러 간 하스미 선생은 관객 중 한 명이 계속 하품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 졸리면 자면 될 터인데 안간힘을 쓰며 하품을 계속하니 순간적으로 살의까지 느꼈다고. 이때 그는 과거 파리의 한 극장에서 존 포드의 <샤이안>을 보러 가서 겪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나자 한 젊은 관객이 다른 남자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젊은 남자는 영화광이었던 모양인데 뒷자리 남자가 영화 보는 내내 존 포드를 조롱했던 것에 격분해서 벌어진 일.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걸 영화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일로 추억한다.
#3 1980년 12월 31일에 라울 월쉬가 죽은 것의 영화적 감동에 대해(1981년)
1981년 1월 3일, 하스미 시게히코는 전철 환승역에서 신문으로 라울 월쉬의 부고를 읽는다. 라울 월쉬는 해적처럼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다녔는데, 부고를 쓴 신문편집부는 하워드 훅스의 사진을 라울 월쉬의 부고 기사에 집어넣는 실수를 했다. 하스미 선생은 그래도 문화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실수라 감복하다, 얼마 전 영화평론가 나카무라 도요가 <디어 헌터>를 베스트 10 중 3위로 뽑은 것에 공개적으로 비판글까지 쓴 자신을 속이 좁았다며 반성한다.
#4 리건을 레이건으로, 팔마를 파머라 부르는 것보다 가토 타이를 보면서 히치콕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 훨씬 영화적이다(1981년)
가벼운 글이지만 분노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사람들이 본질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분노, 그런데 나는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뒤섞여 있다. 발단은 이렇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할리우드 배우 로널드 리건으로 기억해 왔다. 배우 때는 리건이라 쓰더니 대통령이 되더니 레이건이라 쓴다며 투덜댄다. 일본 언론이 원음주의에 입각해 리건을 레이건이라고 갑자기 부르는 상황이 배알 틀린다. 우리로 따지면 주윤발이 하루아침에 저우룬파로 불려지는 일과 같다. 민주당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 레이건이 승리한 것은 미국이 월남전에 대한 반성 보다 더 강한 미국을 주장하는 우파 정권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이럴 거면 천황제의 일본보다 나은 게 없다며 세게 비판한다.
이야기는 <드레스트 투 킬>로 넘어간다. 브라이언 드 팔마라 쓰는데 원음주의를 적용하면 '드 파머'라 불러야 한다. 아무튼 드 팔마는 평소 히치콕과의 영화적 혈연관계를 주장해 왔는데, 비평가들이 이를 높이 평가하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드지 않는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드레스트 투 킬>이 그저 겉핥기 흉내에 불과하다고 본다. 대신 히치콕과 혈연관계로 읽혀야 할 감독으로 일본의 가토 타이의 <불꽃과 같이>를 추천한다.
#5 오즈를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시대는 자끄 베케르를 망각했다는 부자연 위에 세워진 것이다(1981년)
하스미 시게히코는 1963년 파리에서 신문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부고를 읽었다. 그때만 해도 평단과 대중은 오즈를 충분히 조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을 쓴 1981년에 오즈 야스지로의 특별전이 열리고, 오즈를 존 포드, 장 르누아르 같은 거장으로 추앙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하스미 선생은 지금 말고 1963년에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글을 썼었더라면 위안이 됐을까 자문하다 지금 혹시 놓치고 있는 시네아스트는 없을까 불안해하다 자크 베케르를 떠올린다.
#6 실패작이 영화적 욕망에 가져오는 귀중한 필름적 자극성에 대해(1981년)
로버트 알트만의 <뽀빠이> 일본 개봉에 붙여 하스미 시게히코는 걸작만큼 '영화적 욕망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실패작에 대해 논한다. 그는 이 영화를 보고 아직도 실패작이 만들어진다는 기쁨을 느꼈다는데, 그렇다면 실패작은 무엇일까? 실패작은 각본의 파탄, 연출상의 오류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완전하게 절대적 불균형 상태에 도달한 영화를 말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가케무샤>, 이마무라 쇼헤이의 <좋지 아니한가>,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 브라이언 드 팔마의 <드레스트 투 킬>은 하스미 선생의 기준에 따르면 실패작조차 되지 못한 영화들이다. <지옥의 묵시록>은 실패작을 찍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를 보여준다고 하고, 현재 할리우드에서 실패작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은 존 휴스턴뿐이라 말한다.
<뽀빠이>는 영화 전체가 미쳤다. 로버트 알트만 정도 되는 지적인 감독이 올리브 캐릭터를 닮은 셜리 듀발에게 진짜 올리브 연기를 시킨다는 자체가 이미 정신 나간 발상이며, 마을 사람들이 폭풍울 뚫고 마을로 돌아온 선원을 억지로 뽀빠이로 만든다는 플롯은 음침하기 짝이 없다. 이런 영화를 몰타해까지 가서 몇 달간 로케이션 하여 만든다는 것은 상업적인 자살시도에 다름 아니다. 알트만은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고도로 냉소적 감성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이런 영화를 일본 배급업자는 여름방학을 노려 어린이 특선으로 개봉하기에 이르니, 기획과 제작, 일본 개봉까지 아이러니의 토탈 패키지라 할만하다. 이런 실패작은 정말 흔치 않다.
#7 최고의 이마무라 쇼헤이가 최악의 브레송에 뒤진다는 영화적 규칙의 잔혹함에 대하여(1983년)
1983년 칸 영화제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함께 경쟁부문에 출품된 로베르 브레송의 <돈>은 브레송 작품 중에선 떨어져도 <나라야마 부시코>보다 월등히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는 하스미 선생이다. 이 일을 두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아주 잔혹한 두 개의 영화적 규칙을 떠올린다.
하나는 최고작가가 만든 영화는 아무리 최악이라 해도 평범한 감독의 최고작보다 낫다는 명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나라에서 자국의 최고작가에게 믿기 힘들 정도로 냉담하다는 규칙이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차기작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돈 구하러 다니는 오손 웰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대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가케무샤> 제작비를 지원했다. 프랑스는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에게 황금종려상을 안기고, 자국의 브레송에겐 무관심했다.
#8 영화적 기억이란 영화사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인 무시의 향연이지 않으면 안된다(1985년)
1985년, 갑자기 불어닥친 영화제 열풍 속에 하스미 선생이 자유연상기법에 가깝게 쓴 글이다. 동경에 있을 때 파리나 뉴욕의 영화적 환경이 부러웠는데, 어느새 일본도 벨로키오, 타비아니 형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영화의 수도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영화문화의 홍수 속에 진짜 봐야 하는 미국영화 로버트 알트만, 존 카사베테즈, 알란 파큘라의 작품은 일본 개봉이 요원하고, 카토 타이와 요시다 기주 감독은 신작을 찍지 못하는 현실에 온갖 영화제만 개최되니 영화제가 과연 영화문화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의심이 든다.
9)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1982년)
헨리 폰다의 부고를 듣고 쓴 글이다. 20년 전 도쿄에 왔을 때 폰다는 존 포드에 대해 'He was a great director'라 말했다. 한때 좋았던 감독이라니... 이 대목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는 심사가 뒤틀렸다. '<수색자> 이후 만년의 포드의 아름다움은 무대배우 헨리 폰다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포문을 열더니, 말년의 폰다 커리어를 조목조목 깐다. 대배우의 죽음에 바치는 글이 오래 묵혀왔던 폰다에 대한 비난이다. 영화광들은 한번 심사가 틀리면 절대 잊는 법이 없다. 그러니 조심하자.
※ 7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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