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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蓮寶重彦) 영화비평선 - 7부 고다르의 문제

by homeostasis 2023.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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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속에서 Part 5

이번 챕터는 장 뤽 고다르 론(論)이다. 고다르는 전 세계 감독 중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 열광, 냉소는 이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 지금 현재, 고다르라는 이름을 교양 상식으로 익힌 사람은 있어도, 영화를 본 이는 소수다. 하스미 선생의 이 글은, 그 소수가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보고 길을 잃을 때 참조할 만한 여러 지도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10) 파국적 슬로모션(1985년)

#1 Le Gai Savoir(즐거운 지식)

고다르는 이 세상 그 어떤 감독과도 다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우리 누군가와 닮은 고다르가 찍는 영화가 우리가 찍는 영화와 전혀 닮은 데가 없는 현상'을 '고다르 현상'이라 부르자며 독자에게 제안한다. 물론 알프레드 히치콕, 존 포드, 라울 월쉬 같은 거장들의 영화 또한 누군가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이다. 개성적인 작가들이고, 자신만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는 탁월하고 숙련된 연출력을 지녔다. 그래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반면 고다르는 위에 언급된 작가들과 달리 천착하는 주제도,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는 문제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 해결에 전념한다. 그렇다 해서 난해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독창적인 해결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고다르가 골치 아픈 작가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Une Femme Est Une Femme(여자는 여자다)

다른 감독들은 자기 개인의 문제가 있어, 이를 드러내거나 해결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 '어째서 여자는 여자인가?', '살인자는 왜 살인하는가?' 같이 How, Why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고다르의 영화는 그저 '영화는 영화다'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단언명제 - '살인자는 살인한다.' '밀고자는 밀고한다.' '여자는 여자다' - 들의 나열이다. 그의 단언명제는 언제나 '어째서', '왜냐하면'을 배제한 형태로 그 어느 것에도 저촉하지 않으면서 그 중간에 형성된다. 질문과 대답에서 출발하는 것도, 거기에 도달하는 것도 아닌, 그 중간에 머물면서 같은 문장의 반복으로만 형성되는 언어, 이것이 고다르적인 문제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3 Sauve Qui Peut(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고다르의 단언명제는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어째서도, 왜냐하면도 아니고 '여자는 여자다'라는 명제만 제시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살인자는 살인한다.'라 말할 때 왜 그는 사람을 죽였는가, 또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를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사회적, 심리적 필연을 보여주며 관객이 납득할 만한 문맥을 만들지 않으면 영화작가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다르의 영화는 경솔하고, 도식적이고, 깊은 사고를 결여한, 폼 잡기 좋아하는 사람의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다르의 <열정>은 펠리니의 <8과 1/2>처럼 영화작가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영화작가의 기쁨과 고통을 두드러지게 배치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작가는 영화작가다'라는 단언명제를 제시할 뿐이다. 바로 여기서 고다르 영화의 개성이 드러난다. 고다르는 몇 개의 단언명제를 배치한다. 여자는 여자이고, 영화 작가는 영화작가이고, 살인자는 살인자다. 그런 다음 무수한 단편적인 인생이 교착하며 체험하는 장을 만든다.

'여자는 여자다'는 어느 때 '여자는 영화를 찍는다'가 될 것이고, '영화작가는 영화를 찍는다'가 어느 때 '영화작가는 살인한다'가 될 수도 있다. 고다르는 단언명제들을 나열한 다음 분리하여 무수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미녀갱 카르맨>은 영화작가는 영화를 찍는다, 여자는 여자다, 살인자는 살인한다, 도둑은 도둑질한다, 실업자는 실업 중이다, 거짓말쟁이는 거짓말한다, 도망자는 도망한다... 등의 단언명제가 서로 교차하며 그때마다 결정적인 조합을 만들어간다. 관객은 영화가 여러 문제를 매개 없이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인생이구나' 이유 없이 납득하게 된다.

#4 Sauve Qui Peut(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영화는 인생이다. 인생 안에 영화가 있거나, 영화가 인생을 묘사하는 게 아니다. 인생이, 영화인 것이다. 고다르는 즉흥적으로 단언명제를 계속 교차하고, 조합한다. 이 문제의 바꿈은 영화의 풍부한 표정을 묘사하려는 게 아니라 문제의 다양한 단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비평가 시절부터 25년 넘게 영화의 최전선, 전위에 서 있었던 '고다르에게 영화사라는 것은 어떤 단언명제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는 확인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그 조합이 부단히 위치를 바꾸고 운동하고 교환하고 말살하고 날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5 Passion et / ou Slow Motion(열정 그리고/ 혹은 슬로모션)

<네 멋대로 해라>의 강렬함 때문일까. 사람들은 고다르를 생각할 때 '질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고다르의 영화만큼 속도와 거리가 먼 영화는 없다. 고다르는 질주가 아니라 주저, 우회, 정체를 찍는다. 그의 영화는 양자택일(or)이 아니라 '그리고 / AND'로 연결되는 세계다. A와 B가 있을 때 and가 틈새라 하면, 고다르는 그 틈새를 계속 넓혀간다. 이때 넓혀가는 운동은 슬로모션으로 표현된다. 하스미 선생은 이것을 파국적 슬로모션이라 표현한다. 고다르의 인물들은 두 개의 것 사이에서 '모르겠다' 말하며 미결단의 상태에 빠진다. 문제는 틈새가 계속 넓어진다는 것이다. 빛은 개인적 문제의 해결을 용이하게 하는 기술적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를 대신해서 고다르 현상을 해결하는 것으로 광선과 조명이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고다르에게 빛은 - 그리고 영화는 해결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다.

※ 8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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