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Part 7
1950년대는 일본영화의 황금기였다. 자국 영화산업은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시작으로 칸, 베니스 같은 국제영화제에서 일본영화의 수상 소식이 연일 전해졌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일본영화의 위상은 이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락했다. 그동안 일본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스미 시게히코는 50년대 작품 <치카마츠 이야기>를 통해 미조구치 겐지와 일본영화가 다다른 경지를 설명하는 한편, 황금시대 이후 일본영화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12) 어두워져 가는 시간 속에서 - 미조구치 겐지 <치카마츠 이야기> (1986년)
#1 1950년대의 미조구치 겐지
오즈에게는 류 치슈, 미야케 구니코가 있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미후로 도시네, 시무라 다카시라는 페르소나가 있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콤비, 혹은 동반자적 관계라 불릴만한 배우가 없었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스타를 받아들여,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대치의 효과를 이끌어 내곤 했다. 그런데 <치카마츠 이야기>를 포함한 50년대 작품부터 배역에 맞지 않는 배우를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노력 자체를 아예 포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조구치는 리얼리즘과는 무관한 감독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진짜 같음을 위한 배려는 하지 않았다. 대신 미조구치 겐지의 관심은 '필름적 담론의 질'에 향해 있다.
<치카마츠 이야기>에서 철야 근무를 하고 아침을 맞은 표구장인 모헤이를 사장 오상이 찾아오는 장면이 있다. 섬세하게 연출된 이 시퀀스는 분명 사랑의 예감 같은 것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두 사람이 밀회를 나눌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사랑과 완전히 무관한 내용이다. 왕은 모헤이에게 돈을 빌려달라 간청하고, 모헤이는 기꺼이 수락한다. 사랑의 장면이 아닌데도 사랑의 장면처럼 연출되고 있다는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 2 미조구치의 사랑
오상과 모헤이는 봉건적 신분을 뛰어넘어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예전부터 연정을 품고 있었다거나, 어느 순간 반하게 되었다 같은 설명이 없다. 미조구치는 두 캐릭터의 내적 심리를 묘사하지 않고 돈 융통을 위해 오상과 모헤이가 만나는 장면을 사랑하는 장면처럼 찍어 버렸다. 이 장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히치콕의 <현기증>에서도 등장한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처를 감시하는 장면이 그렇다. 레스토랑에서 부인을 찾는 스튜어트의 시점 쇼트는 그가 이 여성을 욕망하기 이전에 사랑의 감정을 형상화한다.
# 3 금지된 시선과 찰나의 시선
유사점이 있지만 미조구치와 히치콕의 시점 쇼트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현기증>의 카메라워크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시선의 움직임에 따른 것인데, <츠카마츠 이야기>는 시선과 카메라가 겹치지 않는다. 편집 역시 쇼트/리쇼트의 순서가 아니다. 시점쇼트가 없는, 시선의 교환 장면이 없는 러브 스토리가 가능 키나 한 것인가? 이 어긋난 연출은 영화 속 남녀가 봉건적 신분제 안에서 서로 바라보는 것조차 금지된 관계임을 드러낸다. 대신 모헤이와 오상은 사운드로 소통한다. 오상이 금(琴)을 갈무리하는 소리, 걸레질하는 소리, 뭔가 계속 부딪히고 문지르는 소리들. <치카마츠 이야기>는 시선이 아닌 닿는 것의 영화다.
소리는 두 사람을 사랑으로 이끌고 억제해 온 시선은 마지막에 이르러 전율의 순간을 낳는다. 오상이 모친과 오빠의 설득을 당하는 장면에서 깜깜한 밤, 무언가 소리가 들려 어두운 뜰로 눈을 돌린다. 이 장면에 이어지는 사람이 없는 뜰의 숏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응시하는 눈동자와 그 시선의 대사이 하나로 맺어진다고 하는, 이 영화에서 예외적인 편집이 이 정도 정감을 떠오르게 하는 것에 깊은 놀라움을 느낀다. '이 롱숏의 훌륭함은 모든 멋진 영화적 순간이 그러하듯이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사람을 유도하지 않을 수 없다.'
13)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 - 미조구치, 오즈, 나루세(1986년)
#1 성숙의 조심스러운 몸짓
1956년 8월, 미조구치 겐지가 죽고, 1963년 메이저 영화사들이 도산에 위기에 처해있던 시기에 오즈 야스지로가 사망한다. 이때만 해도 해외에서 일본영화하면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를 떠올렸고, 오즈와 나루세 미키오는 미지의 감독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국제적인 평가에 있어 오즈, 미조구치, 나루세가 동렬에 놓이고, 그다음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케이스케, 이마이 다다시를 언급한다. 오즈, 미조구치, 나루세의 공통점을 꼽자면 이들이 무성영화 말기에 작가가 되어 1950년대에 성숙에 이른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카메라 하나로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이들은 깨우치고 있었다. 세 감독이 일본의 황금시대를 풍요롭게 했고, 그 아래 세대 구로사와, 기노시타 등을 든든히 받치고 있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 이 세 명의 감독들은 1950년대에 특정 여배우를 만나며 최고 걸작을 찍었다. 미조구치는 <오하루의 일생>에서 다나카 기누요를 만나며 광채를 내기 시작했고, 오즈와 나루세의 50년대 걸작은 하라 세츠코 없이 성립될 수 없다.
#2 카메라맨의 영화
3인의 작가들의 50년대 걸작은 여배우의 영화인 동시에 카메라맨의 영화다. 1940년대의 미국처럼, 일본은 1950년대에 스튜디오의 숙련된 스태프들의 기술적 완성도가 물에 올랐다. 미조구치는 미야가와 가즈오, 나루세는 다마이 마사오, 오즈는 아츠다 유하루와 콤비를 이루면서 최고의 걸작을 완성시켰다. 당시 영화관계자들의 글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 3인 감독의 위대함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황금시대였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어째서 동시대는 언제나 자기 시대의 가장 귀중한 작가들을 계속 놓치는 숙명을 안고 있는 것일까? 하스미 선생은 어떤 시대에도 영화를 영화로 본다는 것 자체가 생각 이상으로 곤란하다는 사실을 교훈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한국의 소중한 작가들을 지금 놓치고 있을지도 보라는 조바심이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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