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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蓮寶重彦) 영화비평선 - 10부 80년대 출현한 작가들

by homeostasis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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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Part 8

2부의 후반은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쓰인 글들로 채워져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20세기 후반에 출현한 재능(레오 카락스, 허우샤오시엔, 짐 자무쉬)을 응원하며, 중견이 되어버린 베르톨루치와 빔 벤더스의 탐험을 지지한다. 마지막 액션영화 베스트 50의 리스트는 그 면면이 한 번도 본 적 없거나, 액션영화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라 액션영화팬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것이다.

14) 고다르와 트뤼포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의 귀중함을 레오 카락스의 <나쁜 피>는 가르쳐 준다(1988년)

하스미 선생은 고다르와 트뤼포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이 어딘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피>에서 이 두 감독의 영화를 동시에 느꼈나 보다. '찍는다는 행위를 단순한 공감의 표명이 아니라 틀림없이 하나의 모험으로 살게 된다는 것은 어딘가 고다르에게도 통하는 데가 있고... 작중인물에 대한 깊은 집착이라고 할까, 특히 배우에의 사랑이 화면에 넘치고 있다는 의미에서라면' 트뤼포와 통하는 데가 있다. '과거 20년간 고다르의 피와 트뤼포의 피를 함께 느끼게 해주는 영화는 세계에 한 편도 없었다는 사실에 <나쁜 피>는 귀중하기 그지없는 영화'이다.

15)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에조차 실패했다(1988년)

요즈음 비평가들과 달리 하스미 시게히코는 거침이 없다. 공인된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대차게 깐다. <풀 메탈 자켓>은 대놓고 욕할 기분이 나게 한다는 점에서 <플래툰>은 감히 근처에도 못 갈 영화이기는 하지만, <지옥의 묵시록>에 비하면 야심적인 측면에서 사소하고, 시각적인 측면에서는 첸 카이거의 <대열병>에 뒤지며, 작가적 여유라는 점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승리의 전쟁>에 미치지 못한다. 하스미 선생에게 베트남전 영화는 장대한 실패작이 되는 것에 의해서만 겨우 영화일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베트남전의 본질을 앞에 두고 비겁하게 실패할 용기조차 내지 않았고, 이런 큐브릭에게 조그마한 흥미조차 가질 수 없다고 결론을 맺는다.

16) 파라자노프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에 넘치고 있는 영화의 기척에 몸을 드러내보면 어떨까(1990년)

고르바쵸프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마지막 수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로 글의 서두를 연다. 왜?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아르메니아계 소련인이었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죽음에 조전을 보내지 않아서다. 우리에게 낯선 이름 파라자노프는 장년기 대부분을 수감생활로 보낸 비운의 감독이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실시한 미래를 짊어진 세계 영화 작가 선출 투표에서 파라자노프는 60이 넘은 나이로 10위에 올랐다. 

이 리스트의 3위는 <비정성시>를 만들기 전의 허우샤오시엔이 이름을 올렸다. 하스미 선생은 허우의 초기작 <동동의 여름방학>을 떠올리며 영화란 것은 참 잔인하다 혀를 찬다. 영화가 노력의 문제가 아닌, 재능의 문제임을 <동동의 여름방학>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서다.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 그리고 숏을 이어가는 방식을 본 것만으로도 세계의 영화 작가 절반은 절망해서 전직을 생각'할 것이라며 극찬한다.

17) 지금 영화는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런 영화의 침묵에 대해 비평가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것인가(1992년)

90년대 초반, 하스미 시게히코는 비평가보다 총명하고,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한 관객층이 늘어나는 시대에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한다. 이 고민의 시작은 베르톨루치의 <쉘터링 스카이>와 빔 벤더스의 <이 세상 끝까지>을 향한 평단의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누구에게라도 영화를 좋아하게 될 권리는 있음에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영화에게 사랑받을 행운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 언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적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체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기적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세일뿐이다.'누구나 영화에 대해 말하고,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정작 영화는 죽어가고 있다. 영화의 침묵을 근심하여 어떻게든 영화를 살려보려는 자의 영화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만이 비평가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 아니겠냐는 웅변이다.

18) '모든 영화는 미국영화이다(고다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게 된 헐리우드 영화의 참상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서 영화에의 기대를 어떻게 조직하면 좋을 것인가(1992년)

30년 전의 글인데도 시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글에서 지적한 할리우드의 위기가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일본의 극장 관람 횟수가 연 1회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은 극장에 갈 때 그만한 값어치의 영화를 봐야 한다는 기대가 생긴다. 이것을 하스미 선생은 기대의 경직성이라 표현한다. 관객의 기대가 경직될 때, 영화 또한 경직된다. 흥행 영화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기 급급하고, 위험한 소재의 영화, 모험적인 시도는 금기시되어 버린다. 이때 영화는 도박이 된다. 흥행이 안 될 것 같은 영화는 용서받을 수 없고, 실패작의 감독은 영화계로부터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저자는 92년 시점의 할리우드를 50년대에 이어 영화의 두 번째 죽음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50년대 저주받은 감독 중 니콜라스 레이는 관광객으로라도 할리우드에 가지 마라고 경고했다. 이런 레이에게 영화적 제자라 할만한 감독이 있는데 그가 바로 미국 인디의 상징 짐 자무쉬다. 하스미 선생은 92년작 <지상의 밤>의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해 개봉한 베리 레빈슨 감독의 <벅시>를 끌고 온다. <벅시>는 주인공의 죽음이 예정된 영화다. 감독은 관객의 기대에 맞춰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장황하게 묘사한다. 생략의 미덕을 발휘했다면 훨씬 여운 있는 영화가 됐을 텐데 지금의 할리우드는 관객의 감성을 불신한다. 2시간 남짓의 영화는 원래 단순함이 미덕이어야 한다. 짐 자무쉬는 6인의 스태프만 이끌고 영화를 만들었다. 할리우드가 망각한 단순함의 미덕을 직접 실천해 보인 영화다.

19) 액션영화 베스트 50 (1996년)

하스미 시게히코는 본인만의 액션영화 베스트 50을 꼽고, 개봉순으로 나열하였다. 이 리스트에 1등, 2등 순위 매기기는 없다. 그리고 <다이 하드>, <터미네이터> 같은 80년대 액션영화도 없다. 대신 1895년 뤼미에르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로부터 시작하여 1959년작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로 끝나는 명단이다. 50편 영화에 100자 내외의 단평을 달아 두었는데, 그 문장이 질투 날 만큼 재미있고, 신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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