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속에서 Part 3
1980년, 하스미 시게히코는 1955년작 <기적(Ordet)>을 통해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다시 조명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 클로즈 업 같은 키워드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또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할리우드의 액션스타, 보수적 성향의 마초쯤으로만 인식하던 시절에 누구보다 앞서 '영화작가'라고 선언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 <미스틱 리버> 같은 공인된 걸작이 아닌, 이스트우드의 연출 초기작에서 하스미 선생은 무엇을 읽어냈던걸까?
5) <기적>의 기적 - 드레이어의 경우(1980년)
<잔 다르크의 수단>으로 알려진 칼 드레이어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가 신(神), 신앙, 이성 간의 사랑에 지속적으로 천착해 왔다는 평단의 주제적 분석이 쓸데없는 헛소리라 말한다. 드레이어는 '관(棺)'과 '마차', 그리고 '불에 타는 여체(女體)'를 화면에 담기 위해서라면 어떤 부자연스러운 플롯도, 굴욕적인 타협도 기꺼이 수락했을 것이라 본다. 이에 반해 베르히만은 '진지함을 가장한 불성실'이라 평가하는데 '그가 어떤 진지한 테마를 다루더라도 영화라는 기억장치 내부에서 보호', 즉 정확히 논리적인 스토리텔링에 의지하여 영화를 만든다고 비판한다.
하스미 선생은 드레이어의 1955년작 <기적(Ordet)>을 분석하며,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점은 죽은 자가 부활하는 데 있어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마치 존 포드가 <역마차>에서 질주, 추격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인디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말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걸 하스미 선생은 '비밀스러운 공모'라 표현한다.'이것 때문에 <기적>은 <역마차>에 뒤지지 않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된다. 영화가 영화의 작동방식을 스스로 드러내는 순간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기적인데 영화 <기적> 속 사람들은 부활을 일상적인 일인 양 대한다. '<기적>의 기적의 광경만큼 소박한 신앙이나 순수한 사랑 같은 멜로드라마에서 먼 것은 없다.' <기적>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을 받아들이는 쪽과 아닌 쪽, 두 가족의 대립이 서사의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부활을 목도한 모든 이들이 예외적인 초자연의 승리를 가장 자연스러운 일로서 납득한다. 보통 영화라면 극적 갈등을 북돋기 위해 기적을 강조할 텐데 말이다. 부활의 장면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관 자체가 시선을 획득한 순간이 핵심이다. '영화는 관처럼 시선을 관객으로 향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전혀 겁먹지 않고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마주하는 것은 그곳이야말로 영화에서 멀어질 수 있는 장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6)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1980년)
1970년 할리우드는 어느 때보다 세대교체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윌리엄 프리드킨, 프란시스 코폴라, 마이클 니콜스, 알란 파큘라 같은 감독들이 시대적 분위기나 흐름을 영화에 담아내어 각광을 받았다. 평단은 이를 뉴시네마라 불렀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에 대해 누구나 한 마디씩 거들었고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스미 선생은 뉴시네마란 것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미국이 짊어지게 된 좌절과 붕괴를 적당히 향수 젖은 멜로드라마로 표현한 것뿐이라 단언한다. 같은 시기 배우이자 스타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연출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내놓았다. 그는 일군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풍조에 전혀 가담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 뉴시네마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떠들던 비평가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린다>에 대해선 침묵했다. 하스미 선생은 이것이 무시가 아니라 영화 속 제시카 월터가 면도칼을 휘둘러 낸 상처에 대해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평단은 같은 제임스 딘 영화라 해도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은 칭찬했고 <이유 없는 반항>은 무시했다.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는 박수를 쳤지만 안소니 만의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선 침묵을 지켰다. 전자의 영화들은 비평가들이 딱 원하는 만큼만 가지만, 후자의 작품들은 과잉으로 존재한다. 비평가들은 과잉을 결여라 생각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불행했던 50년대 작가들의 작업을 데뷔작을 통해 계승했다. 뉴시대마의 열풍과 역행하는 반시대적 시대착오를 당당하게 해냈다.
이스트우드와 돈 시겔 감독의 만남에 주목하자. 이탈리아에서 스타가 되어 돌아온 이스트우드는 돈 시겔 감독과 작업하며 연출 수업을 받았다. 돈 시겔은 이스트우드와 일하기 전까지 오로지 저예산, 정해진 일정 등 효율성의 관점에 매달려 있었다. 그랬던 시겔은 이스트우드와 만나면서 비로소 작가적 야심을 품게 된다. 1950년대는 매카시 선풍, 텔레비전의 보급 등으로 재능 있는 작가들이 영화를 떠나기 시작한 시대였다. 극장 관객의 격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작주의 경향이 생기며 할리우드의 암흑기라 불릴 정도였다. 이때 활동했던 감독들은 장르와 예산을 불문하고 효율성을 요구받았으며, 작가의 생각이 쉽게 간파되지 않게 영화를 만들어 내도록 요구받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어둠 속에 벨이 울린다>는 이런 50년대 감독들의 영화와 궤를 같이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웨스턴 3부작은 폭력을 하나의 스타일처럼 보여준다. 영화 속 무법자들의 상처는 마치 의상처럼 금방 벗었다 입을 수 있는 소도구나 마찬가지였다. 감독이 된 이스트우드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린다>에서 이탈리아 서부극이 몸에 두르고 있던 과장되고 유희적인 장식품을 모두 벗어던진다. 특유의 모자, 숄더, 권총 등 기호로 읽힐만한 것은 모조리 벗고 평범한 의상만 입고 등장한다. 제시카 월터가 칼을 들고 나타날 때 맨 몸의 이스트우드는 칼을 든 상대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것은 포옹에서 성교에 이르는 과정을 남자 입장에서 굴욕적으로 강제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훌륭함은 보통 차림의 옷을 입고 화면에 등장한 이스트우드가 가상의 소통도구인 마이크로 폰과 전화에 배신당해 결국 비참한 치부의 노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이르는 것에 있다.
멜로드라마인 동시에 멜로드라마의 가장 내밀한 비판이며, 사건은 오로지 육체의 표면과 사물의 표층에서만 일어난다. '<평원의 무법자>, <이이거 빙벽>, <무법자 조시 웨일즈>, <건틀렛>까지 이스트우드 영화 속 에로틱한 표층의 유희를 보게 된 사람이면 어찌 감히 이스트우드에게 작가적 야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7) 흡혈귀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 소네 추세이 <나의 섹스백서-절정도>(1977년)
일단 본 적도 없고,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나의 섹스백서-절정도>는 1976년에 개봉한 닛카츠 로망 포르노다. 하스미 선생은 이 영화를 흡혈영화를 가장한 포르노라 하지 않고, 포르노를 가장한 흡혈영화라 말하며 독특한 개성을 칭찬한다. 영화를 못 봐서 여기에 어떤 의견도 제시할 수 없지만, 대학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특정 포르노 영화를 극찬하는 용맹 무쌍함이 대단한다.
※ 6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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