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Part 1
<영화의 맨살> 2부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쓴 감독 비평을 소개해 놓은 장이다. 여기서 호명된 감독과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존 포드와 앞치마, 장 르누아르와 파리(Paris), 드레이어와 시체를 넣는 관, 망명자 프릿츠 랑과 둥근 얼굴, 50년대 세대로 묶이는 돈 시겔과 리처드 플레이셔, 고다르와 단언명제, 일본의 3대장 오즈, 나루세, 미조구치, 그리고 50년대 세대의 후예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1) 돈 시겔과 리처드 플레이셔, 또는 그 혼탁과 투명(1975)
돈 시겔과 리처드 플레이셔는 B급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대중들 뿐 아니라 평단마저도 두 감독의 영화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이 안타까운 하스미 선생은 1975년, 일본에서 <블랙 윈드밀>과 <스파이크스 갱>의 개봉을 계기로 두 감독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했다.
지금껏 영화는 정해진 상영시간 안에 밀도 높은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욕구(균형주의)와 통일된 이야기성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충돌해 왔다. 보통은 이 두 가지 방향성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여기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충돌해 왔다. 전자의 대표주자로 윌리엄 와일러를 들 수 있고, 그의 후계자로 <대부>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슈가랜드 익스프레스>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꼽는다. 반면 돈 시겔과 리처드 플레이셔는 후자의 길을 따른다. 5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공교롭게 70년대에 이르러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며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돈 시겔은 이야기를 하는 중에 계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무슨 말을 하는지 흐릿하게 만들고, 리처드 플레이셔는 너무 뻔한 도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역으로 이야기성에서 탈출한다.
돈 시겔은 서부극부터 갱스터까지, 온갖 장르를 만들면서 성장한 감독이다. 효율적, 경제적 스토리텔링이 장기인 돈 시겔은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며 '활극의 혼탁화'를 향해 나아간다. 동시대 형사영화의 대표격인 <프랜치 커넥션>과 비교할 때 <더티 해리>는 스타일리시한 장면 연출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템포 조절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전개 상 아무 의미 없는 에피소드가 끼어들고, 주인공 해리 칼라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괴된 여자는 결국 살해된 채 발견되고 파트너는 목숨을 잃는다. 남는 것은 해리의 허무함과 짜증, 그리고 피로감이다. 이 시기, 돈 시겔이 감독한 영화에는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물(Water)과 다리(Bridge)다. 물은 화면에서 시야를 가리거나 공간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어둠처럼 활용된다. <더티 해리>에선 소화전이 터지며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오고, <블랙 윈드밀>은 와인 저장고에서 포도주가 분출하듯 터져 나온다. 한편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건너갈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도 가도 못해 뛰어내리는 수밖에 공간으로 제시된다. 결국 물과 다리는 무력감을 강조한다. 돈 시겔은 활극으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그 짜증과 무력한 분위기에 매달린다.
돈 시겔과 비슷하게 다작의 작가인 플레이셔는 이상하게 아류작처럼 보이는 영화만 만들었다. 이 글이 쓰여진 1975년에 일본에서만 세 편의 플레이셔 영화가 개봉했는데, <스파이크스 갱>은 <와일드 번치>를, <돈은 죽었다>는 <대부>를, <만딩고>는 <밥의 열기속으로>의 아류작처럼 보인다. 유행이 지난 시점에 뜬금없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플레이셔를 하스미 선생은 '고의적으로 지각하는 감독'이라 평한다. 일부러 아류작 같은 기획을 받아들여 영화를 찍지만 슬로우 모션, 혹은 클로즈업이 필요한 순간에 급히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거나 생략하여 원본과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을 들려주는 게 목표가 아니라 투명하게 보이도록 하여 이야기성을 지워버린다. 플레이셔는 영상에서도 투명함을 추구했는데, 이것을 컬러영화에서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랍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영화 전체를 녹색 색조로 찍는다던지, <만당고>에서 백인과 흑인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게 실내 장면을 온통 갈색의 화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2) 프릿츠 랑, 혹은 원한의 비극(1976)
하스미 시게히코가 불러 낸 또 한 명의 감독은 프릿츠 랑이다. 글 초반부터 하스미 선생은 프릿츠 랑을 독일 표현주의의 굴레에서 설명하는 시도들이 모조리 다 헛소리라며 불만을 터트린다. 독일 시절 영화를 다 모아도 1940년부터 1950년대 말,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프릿츠 랑의 미국 영화에 대한 무시가 얼마나 사무쳤는지 <마부제 박사>를 언급하면서는 '현재까지 그의 유작이 된 것에 틀림'없다며 비꼰다.
하스미 선생이 이 글에서 조명하는 영화는 1942년작 <사형집행인도 또한 죽는다>이다. 2차대전 때 할리우드에서 만든 반나치영화로 알려 있는데, 프릿츠 랑이 평생을 천착해온 '구체(球體)의 팽창과 수축'이란 주제의 결정판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프릿츠 랑을 표현주의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어 생각하다 보니 그의 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원형을 기하학적 기호로만 읽는데, 사실 랑 영화는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닌 감자나 복어처럼 찌그러진 구체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M>의 피터 로례가 풍기는 그 기묘한 인상은 배우의 둥근 얼굴에서 나오고, <사형집행인도 또한 죽는다>의 진 록하트 또한 둥근 얼굴을 가졌다. 랑의 영화에서 둥근 얼굴의 배우는 명목적 주연이 따로 있다 해도 영화의 중심이 된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둥근 얼굴의 배우가 보여주는 불온한 표정이 프릿츠 랑의 영화세계의 전부라고 한다.
<리틀 시저>로 갱스터 장르를 대표하는 스타가 된 에드워드 G. 로빈슨 역시 둥근 몸, 둥근 얼굴의 사나이다. 유고 이민자 출신에 스튜디오 시대를 대표하는 로빈슨은 독일 망명자 프릿츠 랑과 1940년대에 두 편의 영화를 함께 했는데 하스미 선생은 둘의 만남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며 <창가의 여자(The Woman in The Window)>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당대의 평단은 이 영화를 프릿츠 랑의 타락이라 부를 정도로 혹평했는데 하스미 선생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화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던, 둥근 에드워드 로빈슨이 길가 화랑의 사각형 창문 너머 보이는 사각형 캔버스 속 여인 초상화에 매료되어 타락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창가의 여자>야말로 프릿츠 랑의 영화 세계, 즉 정방향에 의해 수축되는 구체의 괴로움, 그리고 완벽한 구체로의 지향을 담은 작품이라 추앙한다. 프릿츠 랑의 영화 속 피터 로례, 에드워드 G. 로빈슨, 진 록하트의 둥근 얼굴은 완벽한 구체라기보다 감자를 닮은 것으로 팽창과 수축 속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반면 <한번 뿐인 삶(You Only Live Once)> 속 실비아 시드니는 그 둥근 얼굴이 완벽한 구형의 결정체로 변한다. 이 영화는 죄 없이 감옥에 갇힌 헨리 폰다가 진범이 잡혀 풀려나는 순간 진짜 살인을 범하게 된다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지적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하스미 선생은 여기서 주인공이 헨리 폰다가 아니라 변호사의 비서 역을 맡은 실비아 시드니라고 본다. 그녀는 헨리 폰다와 사랑에 빠져 그가 출옥할 날만 기다린다. 누명을 벗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가 했더니 남자는 다시 구속된다. 그녀는 아이까지 여동생에게 맡기고 헨리 폰다의 탈옥을 기획하는데, 이때 그녀의 둥근 얼굴은 관객의 동정을 얻지 못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자를 지킬 거라는 자기 확신으로 변한다. 직각-수직-정방형의 공간인 감옥에서 실비아 시드니의 둥근 얼굴이 등장할 때, 헨리 포드는 탈출하거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프릿츠 랑은 왜 구체를 닮은 얼굴을 중요시 여기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영화는 직각의 스크린에 영사기에서 나온 둥근 빛을 비추어 만들어 낸다. 직각의 세계에서 동그란 모양을 고수한다는 것은 이렇듯 영화의 본질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직각의 세계에서 동그란 모양을 지켜낸다는 것이 파시즘에 대한 프릿츠 랑의 작가적 태도라고 읽어낸다. 파시즘이 태동한 원인 자체가 억압되고 약한 민중이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내거나, 가짜 환상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다. 랑은 영화 속에서 곡선이 직선을 닮으려 하면 안 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곡선의 형태를 지켜냈다. 그 곡선이 울퉁불퉁한 감자처럼 추하고 보기 싫은 것일지라도 경멸해선 안되고 긍정해야 한다. 그 순간 가짜 연대, 파시즘을 이겨낼 수 있다는 프릿츠 랑의 생각이 담겨있다.
※ 4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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