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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두번 봐도 재밌는 영화(★★★)

헨리의 이야기(Regarding Henry) 1991년 - 3부 인생 리셋의 위험성

by homeostasis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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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는 헨리(해리슨 포드 / Harrison Ford)에게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빼앗아 갔다. 대신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은 헨리에게 행운일까, 비극일까? <헨리의 이야기>는 '어쩌면 행운일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영화다. 감독 마이크 니콜스(Mike Nichols)는 해피 엔딩으로 달려가면서도 자꾸 뒤를 쳐다본다.

해리슨 포드의 연기 차력 쇼

헨리는 물리치료사 브래들리(빌 넌 / Bill Nunn)의 도움으로 다시 걷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재활병원을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헨리는 운동화 끈도 혼자 맬 수 없다. 아내 새라(아네트 베닝 / Annette Benning)와 딸 레이첼(카미안 알렌 / Kamian Allen)은 기억나지 않는, 모르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이때부터 영화는 해리슨 포드가 하드캐리 한다. 블록버스터 속 히어로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해리슨 포드가 제대로 한방 먹인다.

냉혹한 변호사 일 때 해리슨 포드는 올백 머리에 차가운 말투로 헨리를 연기한다. 기억을 잃은 헨리를 표현할 때 해리슨 포드의 눈빛은 180도 바뀌어 있다. 표정은 장난꾸러기 꼬마 같다. 영화에는 포드의 연기 디테일이 빛나는 장면들이 많다. 헨리는 퇴원 후부터 영화 마지막까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목발이나 지팡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걸을 수 있지만 한쪽 다리를 조금씩 전다. 뇌손상으로 인한 몸 반쪽의 마비 증상을 표현한 것이다. 퇴원하는 날의 장면을 보면, 가족을 만난다고 깔끔하게 티셔츠를 갈아입었지만 단추를 잘못 채웠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장면 곳곳에 해리슨 포드의 꼼꼼함이 숨어있다.

무엇보다 가족!

퇴원 당일, 헨리는 병원에 계속 있겠다고 고집하고, 아내 새라는 충격을 받는다. 헨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두렵다. 이런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딸 레이첼이다. 운동화 끈을 묶지 못해 쩔쩔 메고 있을 때, 레이첼이 다가와 아빠를 돕는다. 그 방식은 과거 헨리가 레이첼에게 처음 운동화 끈 묶기를 가르쳐 줬을 때와 같다. 헨리는 어렴풋이 딸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꺼이 레이첼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헨리의 이야기>를 다시 본다면, 그건 전적으로 아빠 헨리(해리슨 포드 / Harrison Ford)와 딸 레이첼(카미안 알렌 / Kamian Allen)이 함께 있는 장면들 때문이다. 사고 전 헨리는 자기중심적인 아버지였다. 레이첼은 아빠가 무서워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헨리는 과거의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딸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이루어진다. 레이첼은 아빠 헨리에게 글 읽기를 가르치고, 헨리는 딸이 원한 강아지를 집에 데려온다. 레이첼을 연기한 아역배우 카미안 알렌은 촬영 당시 12세였다. 사춘기 직전, 부모와 벽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의 나이다. 이때의 아이는 철 없이 밝을 때도 있지만, 세상사의 어두움을 조금씩 알아간다. 더불어 어른스러운 책임감도 생긴다. 카미안 알렌은 <헨리의 이야기>에서 딱 이맘때의 소녀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제 마음을 못 알아주는 부모에 실망할 때, 집 안에 닥친 비극을 어렴풋이 짐작할 때, 소년으로 돌아간 듯한 아빠 해리슨 포드와 친구처럼 교감할 때, 각 장면에서 카미안 알렌은 입체적인 표정으로 영화에 크게 기여한다. 감독 마이크 니콜스도 카미안 알렌과 해리슨 포드의 케미를 심상치 않게 봤던지, 둘이 함께 하는 장면에서 좀처럼 앵글을 바꾸지 않는다. 한 프레임 안에서 연기하는 포드와 알렌을 포착한 뒤 둘의 연기를 지켜본다. 

집으로 돌아온 헨리는 그렇게도 싫어했던 식탁 테이블에 애착을 갖는다. 좋아했던 계란 요리는 싫어하게 됐다. 가족들은 달라진 헨리를 따뜻하게 품어준다. 레이첼의 도움으로 글을 읽게 됐을 때, 헨리는 기뻐 날뛰며 온갖 주방용품의 상표를 큰 소리를 외친다. 새라와 레이첼, 가정부 로셀라가 모두 부둥켜안고 기쁨을 함께 한다. 강아지 버디의 존재감도 관객의 미소를 번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버디를 안고 있는 헨리를 새라가 꽉 껴안자, 중간에 끼인 버디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세 가족이 손을 잡고 걸을 때, 버디는 산책이 즐거운 듯 어쩔 줄 몰라 날뛴다. 금이 가 있던 가족이 이렇게 조금씩 봉합된다. 흐뭇한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도 든다. 헨리가 의식불명으로 있을 때 극의 중심을 차지했던 새라가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착한 아내의 자리로 고착되기 때문이다. 아네트 베닝의 뛰어난 재능을 울타리에 가둔 듯하다.

가족이 중요한 이유

법무법인의 대표 찰리(도널드 모팻 / Donald Moffat)는 휴머니즘을 과시하기 위해 헨리를 회사에 출근시키고 예전에 쓰던 사무실과 비서까지 내어준다. 다들 반갑게 헨리를 맞이하고 박수까지 쳐주지만, 이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특히 헨리가 자신이 승소한 매튜 건을 파고들자, 회사는 인정과 실리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한다. 처음에 헨리는 단순히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살펴보자는 의도였으나, 끈덕진 기질은 변치 않았는지 의료과실 소송에서 원고 매튜 쪽에 유리한 증언을 고의로 누락한 증거를 찾아낸다. 이 사실을 알게된 회사는 헨리의 방을 가장 좋은 곳에서 구석으로 옮기고, 소송 자료를 볼 수 있는 권한도 차단한다. 아내 새라 역시 비슷한 일을 겪는다. 절친이라 생각했던 필리스(로빈 바틀렛 / Robin Bartlett)가 얼마 안 있어 새라가 파산한다는 둥, 바보가 회사 돈만 축낸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헨리와 새라는 전부라 생각했던 사교 네트워크가 결국 이익을 서로 주고받을 때만 유지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헨리에게 슬픈 일이 닥친다. 딸 레이첼이 고급 사립학교에 들어가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됐다. 헨리는 레이첼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정말이지 견딜 수 없다. 입학실날, 헨리는 가기 싫어하는 레이첼을 보통의 아빠처럼 다둑이며 교실로 들여보낸다. 멀어지는 레이첼의 뒷모습을 보며, 헨리는 아이처럼 울먹인다. 이때 해리슨 포드의 연기는 배우 커리어에서 최고로 눈부신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나를 찾아서

헨리와 새라의 관계 역시 새롭게 변한다. 마치 연애시절로 되돌아간 것 처럼 다시 사랑에 눈뜬다. 행복에 한걸음 다가간 순간에, 과거의 죄악들이 이들 부부를 노린다. 헨리는 새라의 비밀을 알게 된다. 물리 치료사 브래들리가 헨리에게 했던 야한 농담 중에 유독 불륜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아내 새라는 헨리의 동료 변호사 브루스(브루스 알트만 / Bruce Altman)와 몰래 만남을 갖고 있었다. 헨리는 여기에 분노해 집을 나선다. 방황하던 헨리는 우연찮게 들른 리츠 칼튼 호텔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벨보이를 보고 이상함을 감지한다. 헨리가 내뱉은 첫마디가 '리츠'였던 것은 '리츠 크래커'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동료 변호사 린다(레베카 밀러 / Rebecca Miller)와 이 호텔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남을 주기적으로 가졌던 것이다. 심지어 헨리는 새라와의 이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깨달으며 헨리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부림친다.

헨리 앞에는 이제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있다. 법무법인에서 바보 취급을 받으며 지낼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원점에서 시작할 것인가?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명확하다. <헨리의 이야기>는 파라마운트에서 배급한 여름 영화다. 영화는 명품 옷을 입은 변호사들의 세상보다 사람 냄새나는 보통의 세상을 우위에 둔다. 대중영화답게 헨리는 벨 보이, 가정부, 흑인 웨이터들과 격의없이 지낸다. 한스 짐머의 불안한 듯 밝은 음악처럼, 헨리 가족이 다시 모여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것이 해피 엔딩임은 틀림없지만, 닥쳐올 고난 또한 뻔히 보이기에 불안하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이들 앞에 행복만 가득하길 바라며, 영화 밖으로 사라지는 세 가족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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