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 (2007년)
이 책 후반부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글일 수도 있다. 과거와 지금을 돌아보며 영화 비평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본인의 의견을 밝힌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곱씹을만한 화두를 던진다.
# 데이터베이스화의 환상
VHS와 DVD가 대중화되기 이전에 영화 평론가는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다는 필사적인 각오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1회성의 체험이므로, '동체시력'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했다'라고 하는데, 이건 농담이 아니다. 한 프레임에 담긴 시각정보의 양은 무수히 많다. 이걸 다 기억할 수 있는가? 혹은 놓친 것은 없는가?
"영화비평을 쓰기 전의 나는 어떤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 자만이 영화 비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동체시력이 없으면서도 영화비평을 쓰는 사람이 많았고...(중략)..그들은 화면을 보지 않고 단순히 얘기를 말하거나 인물관계나 시대배경 등을 말하는 것으로 영화를 말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 문장에 섬칫한 기분이 들었다. 꼭 내게 하는 말 같아서다.
# 동체시력이 포착한 화면의 운동
과거에 하스미 선생은 숏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하자는 생각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절실했던 거다. 필름을 갖는 것 외에 영화를 소유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선생 본인도 불가능한 일, 환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화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나. 어떨 때는 기억의 왜곡도 발생한다. 하지만 동체시력이 단련된 비평가야말로 흥미로운 비평을 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꾸 화면을 떠나 역사적 사실,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다.
지금은 안방에서 DVD를 구매해 영화를 보고, 얼마든지 정지버튼으로 화면의 정보를 꼼꼼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하스미 선생은 이것이 동체시력을 단련시킬 기회 자체를 빼앗는 건 아닐까 근심한다.
# 유의미한 얼굴
동체시력 약화와 관련해 고전 영화들은 배우의 얼굴을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든 기억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인물의 나이 듦을 표현할 때, 혹은 나이 든 인물이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 부자연스러워도 괜찮으니 배우에게 메이크업을 시켰다. 요즈음은 완전히 다른 배우를 쓰는 경향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이 든 라이언을 완전히 다른 노인 배우가 연기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억되지 않은 얼굴이어도 괜찮은 것인가, 하스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 70년대의 영화 비평 & 73년 세대
60년대말부터 70년대 내내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 조바심이 있었다. '다들 보고 있는 데 왜 못 본 것을 인식하지 못할까'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격찬과 달리 아무도 스즈키 세이준, 가토 타이에 대해선 모른 척했다. 하스미를 비롯한 당대 평론가들은 '누구도 보았을 터인데 본 것을 누구도 충분히 기억하지 못하고, 화면에서 본 것에서 받은 감동을 말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초조를 공유했다.
그리고 73년 세대(빔 벤더스, 빅토르 에리세, 다니엘 슈미트, 파스빈더,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가 등장한다. 누벨바그가 영화비평가들의 운동이었다면, 73년 세대는 비평 활동의 연장으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벌거벗은 상태로 영화에 달려든 사람들이었다. 누벨바그 감독이 기존 영화를 부수면서 등장했지만 그럼에도 영화에 계속 머물렀다면, 73세대는 무의식적이고 무방비적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계속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시기 야마다 고이치와 함께 73년 세대 감독의 영화를 적극 부각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 & 스콜세기가 아니라 자무쉬를 옹호한다.
DVD, 혹은 스트리밍을 통해 뭐든 볼 수 있다는 상황에 대해 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역사의식의 저하,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시점이 희박해진다는 데 있다. 지금 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어떤 영화를 지지해야 하는가, 요즘은 여기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글을 보기 힘들다.
비평은 이 영화도 좋고, 저 영화도 좋다는 식이 되어선 안된다. 억지로라도 선택하는 것이 비평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스미 선생은 자기가 먼저 모범을 보인다.
이를테면 구스 반 산트와 마이클만 중에 선택하라면 단연 마이클 만 쪽이다. 파졸리니와 레오네 중 어느 쪽을 택하는가에 있어서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손을 든다.
마틴 스콜세지는 단호히 '구제 불능'이라 선언한다. 내가 읽은 평론 중에 마틴 스콜세지를 이렇게까지 까는 사람은 하스미 선생이 유일하다. 또 짐 자무쉬의 <브로큰 플라워>를 적극 옹호한다. 훌륭하다 못해 울었다고 고백한다.
"...그 대단함은 샤론 스톤 때문인데 무엇이 대단하냐 설명할 언어가 없기에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 이런 순간이 있냐고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 영화 비평과 영화 연구
영화 비평은 필요하지만 비평만으로 먹고살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저널리즘 쪽 비평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간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비평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은 학교 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대세는 미국의 영화연구인데 이를 대표하는 데이비드 보드웰의 경우, 굉장히 훌륭한 영화 연구자이지만 비평가 정신이 없다. 대학은 성실한 연구자뿐 아니라 비평적 정신의 소유자를 길러내야 한다.
"개개의 작품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 신선함이 사회에 던지는 예상치도 않은 자극에 닿았을 때 그것을 어떤 문맥에서 전달할 것인가"
# '필름의 밀수업자'로서의 생산성
하스미 시게히코는 동경대 총장이 된 이후 각국 영화제의 기획전 및 특별상영행사를 조직하는 데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활동을 '필름의 밀수업자'라 표현한다. 어딘가 범죄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설렘 같은 게 읽힌다. 그 모험담 중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회고한 다음 "이건 우리들 나이의 인간이 할 일은 아니다."라 한다. 나이 듦은 정신적인 의욕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꿈으로 만들어 슬픈 것이다.
# 50년 만의 복수
영화 비평가는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하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는 하스미 선생의 자문으로 글의 후반부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평은 영화를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인데 단순 번역은 의미가 없다. 영화를 보며 내가 변하고,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끊임없이 잠들어 있는 기호를 각성시키려는 시도가 되어야 한다. 하스미 선생은 지금까지 자기의 비평이 일반 관객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를 영화가 아니라, 다른 주장을 위한 도구로 삼거나, 스토리에 대한 분석으로 끝나는 경향에 반대하기 위해 '표층비평'을 주장했다. 그래서 영화사적 담론, 영화와 사회의 관계 분석에 대해 쓰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후학들에게 이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길 당부한다.
그는 50년대 스튜디오 시대의 붕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영화를 '리얼 타임'으로 경험했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니콜라스 레이와 더글라스 서크를 대단하다 생각했고, 마찬가지로 돈 시겔, 클린트 이스트우드, 기타노 다케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스미 선생은 존 포드의 영화가 개봉할 때 뉴욕타임스가 어떤 리뷰를 남겼는지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존 포드는 영화를 모른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고 적으며, DVD 시대가 되었다 해도 영화의 지금을 경험하고 제대로 된 비평을 남기지 못하면 영화는 언젠가 복수를 할 것이고, 몹시도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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