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감독: 빅터 플레밍
출연: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제작연도 : 1939년
상영시간 : 238분
이 영화가 개봉하던 1939년은 흑백분리가 법으로 정해져 있던 시절이었다. 원작자 마가렛 미첼은 남부 사람이고,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도 남부 사람이고, 영화의 주된 배경 역시 남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분명 편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대의 가치관과 동떨어진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임을 감안해야 한다. 비비안 리가 연기한 스칼렛 오하라는 여성인 주제에 성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스스로 통제하길 원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렛의 승승장구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단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게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남성우월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여성 관객들은 그것만으로도 매혹되었고, 남성 관객은 고초를 겪는 스칼렛을 즐겼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관객을 단번에 사로잡는 장면들이 무수히 많다. 단관 시절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주구장창 다시 극장에 걸렸던 게 기억난다. 미국에서도 똑같았던 모양이다.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1954년, 1961년, 1967년, 1989년, 그리고 1998년(복원판)에 극장에서 즐겼다고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번 재개봉 될 것이라 예언한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최상급 솜씨를 보여주는 사례'임과 동시에 '빛바랜 문명을 추억하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2. 바람에 쓴 편지(Written on the Wind)
감독: 더글라스 서크
출연: 록 허드슨, 로렐 바콜
제작연도: 1956년
상영시간: 99분
더글라스 서크는 통속적 멜로드라마로 명성을 얻었다. 그 이름에서부터 멜로드라마 감독처럼 보인다. 사실 그는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도망친 독일인으로 본명은 한스 데틀레프 시에르크다. 서크는 한국 막장 드라마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 <바람에 쓴 편지>는 '부자, 알코올 중독, 여성의 색정증, 발기불능, 자살, 그리고 베일에 가려진 근친상간과 동성애'를 다룬다. 그는 통속적인 드라마를 아주 진지하게, 하지만 가짜라는 것이 빤히 보이게끔 연출했다. 리얼리즘을 활용하는 대신 과장된 표현방식으로 조롱과 냉소의 메시지를 은폐했다.
자신을 숨기는 데 능했던 서크는 50년대가 끝나자 경력의 정점에서 스위스로 이주해 운둔의 삶을 보냈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그의 작품들은 70년대 갑자기 재평가의 대상이 된다. 독일의 천재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드바르는 그의 영화적 아들들이라 해도 무방하다.
3.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s)
감독: 빔 벤더스
출연: 브루노 간츠, 솔베이그 도마르틴
제작연도: 1987년
상영시간: 127분
<베를린 천사의 시>를 할리우드에서 맥 라이언,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한 것이 <시티 오브 엔젤>이다. <시티 오브 엔젤>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희미한 내러티브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다시 꾸몄다. 로저 이버트는 <시티 오브 엔젤>을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다면서 두 작품을 이렇게 비교한다. "<시티 오브 엔젤>은 그저 스크린 위에만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수준은 그 이상이다...슬픔과 고독, 갈망, 세속적인 사건들을 초월하려는 분위기가 가득하다.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라면, <베를린 천사의 시>는 그런 인식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많이 힘들었다. 대단한 영화라 해서 보긴 봤는데 졸립고 지루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감을 못 잡았다. 로저 에버트의 글을 읽으니 다시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영화의 진가를 알아 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 결과는 나중에 알려 드리겠다.
4. 보디 히트(Body Heat)
감독: 로랜스 캐스단
출연: 캐서린 터너, 윌리엄 허트
제작연도 : 1981년
상영시간: 113분
<차이나타운>이 LA 누아르라면 <보디 히트>는 마이애미 누아르다. 시뻘건 태양 아래 사람들은 땀을 너무 흘린 나머지 미쳐간다. 변호사 네드(윌리엄 허트 분)는 팜므파탈 매티(캐서린 터너 분)에 빠져 그녀를 위해 살인을 한다. 남자는 자신이 범행을 주도적으로 기획했다고 생각하지만, <보디 히트> '자기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도록 남자를 조종하는 여자를 다룬 영화'다.
7~80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 폴린 카엘은 <보디 히트>를 '가차없이 깎아'내렸다. 로저 에버트는 이것이 부당하다 생각했는지 '위대한 영화'로 선정하며 low key로 카엘의 의견을 반박한다. 그러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 의견이 합당한 것인지 직접 한번 보고 판단하라고 권한다. 친절하게 "처음에는 남자의 시점에서, 두 번째는 여자의 시점에서 영화를 관람해보라."며 방법까지 제안한다.
5. 부초(Floating Weeds)
감독 : 오스 야스지로
출연 : 나카무라 간지로, 쿄 마치코
제작연도 : 1959년
상영시간 : 119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르건 늦건 결국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는 비슷한, 주로 가족 간의 이야기를 약간씩 다르게 변주하며 찍었다. 생전 일본 대중과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가 너무 소소해 국제적으로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즈 야스지로는 일본 감독 중 가장 빛나는 별로 남았다. 그의 영화가 이야기하는 인물과 감정, 그걸 담아내는 시선, 연출이 만국공통에 가 닿았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영화적 언어,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위반했다. "그는 겁도 없이 경계선을 뛰어넘었고, 시선 일치와 관련한 모든 규칙을 위반하였다. 언젠가 젊은 조감독 하나가 이러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오즈는 시험 촬영에 동의 하였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촬영한 후 두 화면을 비교하였다. 오즈가 말하였다. '보이나? 서로 다르지 않네." 쇼트 - 리쇼트에 의한 전형적 대화 편집 대신 두 인물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대화 하는 숏, 겸손하게 낮게 위치하며 오히려 인물에 권위를 부여하는 다다미 숏 등 오즈는 그 만의 언어로 수많은 후대 감독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6. 분노의 주먹(Raging Bull)
감독 : 마틴 스콜세지
출연 : 로버트 드 니로, 케이시 모리아티
제작연도 : 1980년
상영시간 : 120분
<분노의 주먹> 권투 시합 장면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이 <록키>를 순한 양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영화를 흑백으로 만든 이유가 시합 장면의 유혈 장면이 너무 끔찍해서라고 할 정도다. 마틴 스콜세지는 제이크 라모타가 시합 중에 상대를 응징하는, 그리고 역으로 처벌받는 고통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다. 연기를 한 로버트 드 니로도 대단하지만, 촬영감독 마이클 채프먼과 편집 델마 스쿤메이커 이하 제작진은 주인공 제이크 라모타 못지않은 편집증적 집착으로 권투 시퀀스를 완성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라모타 캐릭터를 밀고 가는 엔진은 권투가 아니다. 아내 비키에 대한 시기심 가득한 강박관념이며, 섹슈얼리티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리고 아름다운 부인에 대한 의처증,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자기가 "의심을 품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에 사로잡혀 주변과 자신을 파괴한다. "<분노의 주먹>은 인간의 질투를 가장 고통스럽고 비통하게 그려낸 영화"이자 "우리 시대의 <오델로>"다.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을만큼 압도적이지만, 무명에 가까웠던 조 페시는 로버트 드 니로 못지 않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7.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li : Fear Eats the Soul)
감독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출연 : 브리지트 미라, 엘 헤디 벤 살렘
제작연도 : 1974년
상영시간 : 94분
스스로를 파괴해가며 미친듯이 영화를 만들었던 파스빈더는 무명의 조연배우 출신의 브리지트 미라와 자신의 연인이자 단역배우 엘 헤디 벤 살렘을 데리고 15일 동안 이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찍었다. '자신은 대작 영화를 찍던 사이에 생긴 짬을 메울 생각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40여 편의 영화 중 최고작'이 되었다.
빌딩 청소부 일을 하는 노년에 가까운 에미(브리지트 미라)는 모로코 출신 정비공 알리(엘 헤비 벤 살렘)과 연인이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지만, 이웃과 가족들은 두 사람을 백안시하고, 혐오한다. 반면 빌딩 청소부와 일용직 노동자 없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도 자명하다. 50년 전 영화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놀랍게도 지금 세상의 현재적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설득력이 넘치지만, 아주 단순하기도 하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이며 '파스빈더는 감정의 고양된 상태와 침울한 상태를 영화에서 모두 제거하고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조용한 절망만을 간직한다.'
파스빈더는 술과 마약에 의지해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 40살도 되기전에 죽었고, 영화에서 알리 역을 맡은 엘 헤비 벤 살렘은 술에 만취해 세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후 체포되어 복역 중 감옥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8. 비브르 사 비(My Life to Live)
감독 : 장 뤽 고다르
출연 : 안나 카리나, 사디 레보트
제작연도 : 1962년
상영시간 83분
로저 이버트의 회고처럼 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 할 거 없이 모두 고다르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대다수의 영화 관객들은 고다르라는 이름에 무표정해졌다. 자막이 달린 외국영화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예술영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자의식적인 영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영화의 한계를 시험하는 영화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큰 돈과 인력이 투입되는 영화를 실험, 예술, 자의식의 반영을 위해 사용하는 게 옳은 일인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영화들이 영화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로저 이버트는 <비브르 사 비>에서 주인공 나나를 연기한 안나 카리나와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카메라에 주목한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순서대로 찍었고, 될 수 있으면 리허설 없이 첫 번째 테이크를 사용했다. '카메라 역시 나나의 삶을 처음 들여다 보는 셈'이고, '우리는 리허설도 없는 나나의 첫 번째 인생을 카메라가 보는 대로 본다. 나나가 살아가는 대로 본다.'
9. 빅 슬립(The Big Sleep)
감독 : 하워드 훅스
출연 : 험프리 보가트, 로렌 바콜
제작연도 : 1946년
상영시간 : 114분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빅 슬립>은 복잡하고 뒤엉킨 플롯으로 악명이 높다. 하워드 훅스가 직접 전보를 쳐 누가 범인인지 물었는데 챈들러가 '젠장, 나도 모르겠소'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밝히지 않은 영화의 수많은 수수께기는 '오랜 세월 동안 <빅 슬립>이 누려온 인기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빅 슬립>은 누가 범인인지 밝히는 영화가 아니라 범죄 수사 과정에 대한 영화다. 보통의 범죄 스릴러는 액션에 방점이 찍히지만, <빅 슬립>은 대사가 훨씬 중요하다. '여러분은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너무나 영리하기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 사랑에 빠졌다. 이 영화는 1945년에 완성됐는데, 개봉 전에 로렌 바콜이 험프리 보가트와 찍은 <소유와 무소유>로 스타가 된다. 완성본을 본 로렌 바콜의 에이전트는 동생 역의 마사 비커스가 로렌 바콜을 존재감으로 압도했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재촬영을 하도록 워너 브라더스를 압박하고, 이게 실현이 된다. 로저 이버트는 1945년 버전과 최종 개봉판을 둘 다 비교해 보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언젠가 그는 잘 만든 영화를 훌륭한 장면이 세 장면 들어있고, 잘못된 장면은 하나도 없는 영화라 정의한 적 있다. <빅 슬립>의 두 버전을 비교해 보면, 재촬영을 통해 훌륭한 장면 하나를 집어 넣었고, 잘못된 장면들은 제거하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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