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탈랑트(L'Atalante)
감독 : 장 비고
주연 : 디타 팔로, 장 다스테, 미셸 시몽
제작 : 1934년
상영시간 : 89분 (복원판)
로저 에버트는 <라탈랑트>를 비평하거나 분석하려고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안 본 사람들을 향해 간절히 보길 권하는 마음으로 읽힌다. "<라탈랑트>는 여러분이 꾸준히 부르는 애창곡 같은 영화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 이 영화를 처음 봤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영화를 볼 때마다 그때 그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도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영화는 정말 흔치 않다. 왕가위의 영화들이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와 같다.
2. 레드 리버(Red River)
감독 : 하워드 훅스
주연 : 존 웨인, 몽고메리 클리프트
제작 : 1948년
상영시간 : 133분
웨스턴이 서부에서 말 타고 총 쏘는 영화라는 생각들을 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법자 주인공을 내세운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인한 선입견일 수 있다. <레드 리버>는 웨스턴의 본질이 광활한 땅, 소몰이 꾼, 힘든 노동 끝에 보상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에 관한 것임을 알려준다. 손대는 모든 장르마다 걸작을 남긴 하워드 훅스의 1948년작이다.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가 완벽하다 말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의 엔딩 및 여인들과 관련된 장면에서 영화는 잘못된 길을 간다고 지적한다. 대신 앞서 말한 서부극의 정수를 잘 포착한 작품이기도 하다. <레드 리버>의 볼거리는 서부 영화 그 자체인 배우 존 웨인과 떠오르는 신예이자 한창 각광받던 메소드 배우의 대표주자 몽고메리 크리프트의 대결이다. 고집 센 늙은이는 그 고집 때문에 파멸에 이르고, 젊은이는 늙은이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존 포드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덩치 큰 개자식이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몰랐었어"라고 하워스 훅스 감독에게 말했다는 일화도 재미있다.
3. 레이디 이브(The Maltese Falcon)
감독 : 프레스톤 스터지스
주연 : 바버라 스탠윅, 헨리 폰다
제작 : 1941년
상영시간 : 93분
로맨틱 코미디를 쉬운 장르라 생각하기 쉽지만, 로맨스와 코미디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기는 정말로 힘든 일이다. 배우의 연기와 매력, 연출, 시나리오 등 모든 요소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런 영화 중 하나가 1941년작 <레이디 이브>다. 바바라 스텐윅은 유람선 1등 선실에 숙박하면서 부잣집 남자를 유혹하여 등쳐먹는 사기꾼으로 나온다. 그녀의 레이더에 걸린 남자를 헨리 폰다가 연기한다. '그녀는 사기꾼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이지만, 그럼에도 로맨스에 쉽게 빠져드는 여자다. 남자의 주머니를 노리는 여자지만,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스탠윅이 <레이디 이브>에서 보여준 연기에 대해 로저 에버트가 쓴 이 문장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매력적으로 보이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4. 말타의 매(The Maltese Falcon)
감독 : 존 휴스톤
주연 : 험프리 보가트, 메리 아스토, 시드니 그린스트리트, 피터 로례
제작 : 1941년
상영시간 : 101분
"관객들이 사랑하는 영화가 있다. 또한 관객이 사랑하는 정도를 넘어서 귀중하게 여기는 영화가 있다. <말타의 매>는 두 부류의 영화를 가르는 위대한 분수령"이다. 나 역시 로저 에버트의 말에 '적극 동의'다. <말타의 매>는 존 휴스턴의 감독 데뷰작이다. 험프리 보가트는 이 영화 전까지 B급영화에 주로 출연하던 배우였지만, <말타의 매> 이후 슈퍼스타가 됐다. 이 영화는 필름 느와르의 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영화 이전에도 필름 느와르라 할 수 있는 영화가 있었지만, <말타의 매>로 인해 하나의 장르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관심이 없는 게 플롯이라 지적한다. "스타일이 전부다. 폭력도 아니고 추격전도 아니다. 배우들의 외모, 움직임, 대사, 그리고 그들의 캐릭터가 채현 하는 것들이 영화의 전부다." 특히 시각적 스타일에 대해 오손 웰스와 촬영 그렉 톨랜드과 <시민 케인>으로 거둔 것과 비슷한 성과를 이뤘다고도 말한다.
대쉴 해미트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의 차이를 설명하는 대목도 명쾌하다. 챈들러가 정의로운 인물이 비열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다면, 해미트는 비열한 인물이 비열한 세상을 살아가는 스토리를 쓴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샘 스페이드를 좋아한 데는 1차 대전과 대공황을 통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이드의 거친 면모 밑바탕에 해묵은 상처와 좌절된 꿈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관객이 감지하기 때문이다."
5.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McCabe & Mrs. Miller)
감독 : 로버트 앨트먼
주연 : 워렌 비티, 줄리 크리스티
제작 : 1971년
상영시간 : 120분
이 영화의 배경은 1902년, 미국의 프레스비테리언 처치란 마을이다. 주민 대부분은 남자이고 가난하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오면 술과 도박, 그리고 매춘부를 찾는다. 여자 혼자 살아가려면 몸을 파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이 마을에 당도한 도박사 맥케이브는 노름판에서 딴 돈으로 매춘 사업을 시작한다. 이 분야의 베테랑 밀러 부인은 맥케이브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비극을 살아낸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살아내야 하지만,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맥케이브는 자기에게 닥칠 운명을 감지하지 못하고, 알고 난 이후는 막아낼 방법이 없다.
<야전병원 매쉬>, <내쉬빌>, <플레이어> 등을 연출한 로버트 앨트먼은 본인만의 확실한 스타일이다. 여러 인물들이 동시에 대사를 하고, 카메라는 인물들 사이를 자유로이 오간다. 그는 코미디, 음악, 누아르, 스릴러 등 여러 장르(심지어 <뽀빠이> 실사판도 연출)를 고유한 스타일로 찍어냈다. 이 영화는 음울하고 쓸쓸하고 애조 띤 웨스턴이다. 레너드 코헨의 노래가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로저 이버트의 표현 대로 '서글픈 변방지역의 만가'처럼 오묘한 감정을 만든다. 로저 이버트는 자기가 본 중 가장 슬픈 영화라며 '이 영화는 한 편의 시'며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한 만가'라 정의한다. "로버트 앨트먼은 이런저런 면에서 위대하다 부를 수 있는 영화를 10편 만들었다. 그중에서 한 작품은 완벽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이다."
6. 맨해튼(Manhattan)
감독 : 우디 앨런
주연 : 우디 앨런, 마리엘 헤밍웨이
제작 : 1979년
상영시간 : 96분
미투의 시대를 거치며 우디 앨런은 과거의 명성을 거의 잃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줬다. 예술가 개인과 그가 만든 작품은 분리해서 봐야 하는 것일까? 42세 남자 아이작(우디 앨런)과 17세 트레이시(마리엘 헤밍웨이)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맨해튼>을 예전처럼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은 웃긴 동시에 아련하며 아름다운 영화다. 볼 때 마다 고든 윌리스가 담아낸 뉴욕 풍경(흑백 화면으로), 재즈 선율, 다이앤 키튼과 마리엘 헤밍웨이의 매력에 빠진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길까 궁금했는데 로저 에버트의 문장이 핵심을 찌른다. <맨하튼>이 "사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상실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질 뻔 했으나 놓친 것들에 관한 영화다.
7.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감독 : 프랭크 캐프라
주연 : 제임스 스튜어트, 도나 리드
제작 : 1946년
상영시간 : 130분
미국이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할 때 감독 프랭크 캐프라와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는 경력의 최고점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여느 미국인들처럼 자원 입대했다. 캐프라는 정훈용 영화를 제작하는 총책임자가 됐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할리우드 톱스타였음에도 폭격기를 타고 수십 차례 전투 임무를 수행한 진짜 전쟁영웅이었다. 전쟁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절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프랭크 캐프라는 전역 후 복귀작으로 <멋진 인생>을 연출했다. 영화의 내용은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튼 것이었다. 꿈을 포기하고 고향을 지켜 온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가 악덕 자본가의 계략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를 구원하기 위해 천사가 내려온다. 전쟁 전 그의 대표작들과 마찬가지로 선한 소시민이 결국 승리한다는 내용의 영화지만 마냥 밝지 않다. 캐프라와 스튜어트는 세상이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전쟁을 통해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최고 감독과 최고 흥행 배우가 만난 <멋진 인생>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흥행에 참패한 뒤 잊혀진 영화가 되었다. 프랭크 캐프라의 경력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과거의 밝은 역할 대신 어둡고 음울한 캐릭터에 빠져들었다.
영화 속 조지 베일리처럼 <멋진 인생>에도 기적이 찾아온다. 1970년대 초반, 영화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되자 PBS 방송국과 미국의 여러 지역 방송국이 공짜로 방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주구장창 이 영화를 틀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크리스마스 때면 온 가족이 모여서 <멋진 인생>을 보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로저 이버트는 <멋진 인생>을 시대를 초월한 영화라 정의한다. "어떤 영화들은 위대한 음악처럼 관객과 친숙해질수록 영화의 가치가 상승한다."
8.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감독 : 프리츠 랑
주연 : 브리지트 헬름, 알프레드 아벨
제작 : 1927년
상영시간 : 130분
프리츠 랑은 영감, 시간, 돈, 스태프들의 피와 땀을 갈아 디스토피아 SF의 시초 <메트로폴리스>를 완성했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해 20세기 대중문화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블레이드 러너>, <배트맨>, 로저 이버트가 사랑하는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다크 시티> 등의 미래 도시 이미지는 모두 <메트로폴리스>에 빚졌다.
프리츠 랑은 전체주의, 권위주의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이 영화에 담았다. 아이러니하게 히틀러는 압도적인 영상미에 반했다. 나치의 영화산업 통제권을 몽땅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화들짝 놀란 프리츠 랑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도망친다. <메트로폴리스>는 검열당국, 배급업자, 극장주들이 입맛에 맞게 가위질을 해서 상영하다 보니 최종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1984년 영화음악가 조르지오 모로더가 독일, 오스트리아의 프린트를 바탕으로 여러 장면들을 덧붙이고 칼러까지 입힌 복원판을 제작했다. 로저 에버트는 흑백 영화에 색채를 입힌 버전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메트로폴리스> 만큼은 모로더 버전이 더 낫다고 권한다.
9. 모래의 여자(Woman in the Dunes)
감독 : 데시가하라 히로시
주연 : 오카다 에이지, 가시다 쿄코
제작 : 1964년
상영시간 : 123분
사막 지대에 마을이 하나 있다. 큼지막한 모래 구덩이가 있는데 누군가 아래로 내려가 모래를 퍼올리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모래에 파묻힌다. 마을 사람들은 한 여인을 그곳에 내려 보냈다. 여인은 매일 모래를 파야 하고, 사람들은 그 대가로 음식과 물을 내려 보낸다. 도시 생활에 지친 한 남자가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고, 그는 마을 사람들 꾐에 넘어가 여인과 함께 모래를 파게 된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 모래를 파는 거요, 모래를 파기 위해 사는 거요?" 이 남자가 처한 곤경은 인생에 대한 우화기도 하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일터나 학교로 가는 모든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 불운한 남녀 중 어느 한쪽일 수 있고, 비정하게 두 사람을 희생시킨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로저 에버트는 "<모래의 여자>처럼 모래를 잘 촬영한 영화는 없다"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이 영화엔 대적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가 된다.
10.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감독 : 장 콕토
주연 : 장 마레, 조세트 데이
제작 : 1946년
상영시간 : 96분
1991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미녀와 야수>는 장 콕토의 1946년작 <미녀와 야수>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의상, 야수의 분장, 성의 풍경, 살아있는 사람의 손이 들고 있는 촛대, 역시 살아있는 조각상 등의 초현실적 이미지는 이 흑백영화가 기원이다. 유명한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장 콕토는 '컴퓨터 효과와 현대적인 분장 기술의 시대가 도래하기 훨씬 전, 트릭 숏과 눈부신 효과'를 사용해 생기 넘치는 판타지를 창조했다. 로저 에버트에 따르면 이 영화는 어린이용 영화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자라서 야수가 될 수 있다"는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말한다. 이 영화는 보는 이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그리고... 야수가 왕자로 돌아왔을 때 야수였을 때의 매력이 증발되는 것은 1941년 실사, 1991년 애니메이션, 2017년 디즈니 실사 영화 모두 동일하다.
※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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