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실존하는, 그리고 가장 오래된 범죄조직 화승화(和勝和)는 우두머리를 투표로 선출한다. 선거인단은 숙부 항렬의 조직 원로들이 차지하고, 당선인은 2년 임기 동안 조직을 이끈다. 다른 조직들은 보스의 2세가 승계하거나 후계자를 지목하는 방식인데 유독 화승화만 선거제를 10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영화 <흑사회>는 '화승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차기 회장 선거를 앞두고 홍콩에서 가장 전통 있는 범죄조직 화연승(和聯勝)은 따이디(양가휘 - 梁家輝 / Tony Leung Ka Fai 분)를 따르는 자와 록(임달화 - 任達華 / Simon Yam Tat Wah)을 미는 세력으로 양분된다. 따이디는 조폭답게 선거인단을 뇌물로 매수한다. 반면 록은 정책(?)을 앞세워 선거전에 임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20분이 지나면 록이 선거의 승자로 결정 난다. 하지만 따이디가 선거 결과에 강력히 반발하며 '선거'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1. 용두곤
화연승은 반청복명 비밀결사 '홍문'에서 유래한다. 홍문은 점조직이라 내부 인사들 조차 누가 보스인지 모르게 관리되었다. 그래서 홍문의 지도자들은 본인의 지위를 상징하는 '증표'가 필요했고, 이것이 용두곤이라 불리는 나무조각이다. <흑사회>에서 따이디와 록은 용두곤을 먼저 획득하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제도로서의 선거가 무력화될 때 이들이 기대는 게 무협소설에나 나올법한 신물(神物)이란 게 아이러니하다. '절대 반지'처럼 권력의 상징인 용두곤은 <흑사회>의 주요 인물들 손을 한 번씩 거쳐간다. 용두곤을 가진 자는 예외 없이 낭패를 보거나 칼에 찔리거나 죽임을 당한다.
2. 실험
두기봉(杜琪峯 / Johnnie To Kei Fung)과 밀키웨이 이미지(銀河映像 / Milkyway Image) 팀은 장르영화의 내러티브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 왔다. 두기봉을 스타일리스트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건 실험과정에서 발생한 일종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는 언제나 가능한 예산 범위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영화적 스토리텔링을 탐색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흑사회>는 시간을 Y축에, 인물을 X축에 놓고 최대한 확장시킨 에픽이다. 과장 좀 섞어 말하자면 <흑사회>는 홍콩 삼합회 버전의 '반지의 제왕'처럼 보인다.
3. 시간과 캐릭터
수직적인 시간, 그러니까 삼합회의 과거, 현재, 미래는 홍문의 비밀의식을 강조하거나 세대 폭이 넓은 출연진 구성을 통해 표현된다. 홍문(洪門)은 긴 세월을 거쳐 조폭집단 화연승이 되었다. 한낱 나무조각에 불과한 용두곤, 조직에 가입하며 행하는 피의 맹세는 수많은 사람들이 흘렸을 피와 배신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왕천림(王天林 / Wong Tin Lam), 담병문(譚炳文 / Tam Bing Man), 진소붕(陳少鵬 / Chan Siu Pang), 당배중(唐培中 / Tong Pau Chung) 같은 진짜 노인 배우들은 얼굴 주름, 늘어진 뱃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늙은 신체는 그 자체로 죄와 욕망의 역사다. 노인들은 록과 따이디의 미래이고 록과 따이디는 이들의 과거다. 고천락(古天樂 / Louis Koo Tin Lok), 임가동(林家東 / Gordon Lam Ka Tung), 장가휘(張家輝 / Nick Cheung Ka Fai)가 연기한 젊은 갱스터들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가로축은 화연승 조직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탐구다. <흑사회>는 주연배우가 딱히 없다. 임달화, 양가휘, 고천락이 중심인물이지만 대사가 있는 배우들은 저마다 각자의 장면에서 주인공이 된다.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수호지>를 보는 것 같다. 최연장자지만 여전히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 백부(왕천림 분), 나이만 들었지 탐욕을 버리지 못한 췬바우(담병문 분)과 룽군(신선 - 神仙 / San Sin 분), 전임 회장 처이가이(왕종 - 王鐘 / Wang Chung 분), 이들과 같은 항렬로 어디에 줄을 설까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러 두목들, 그 보다 아래의 행동대장급의 둥군(임가동 분), 다이타우(임설 -林雪 / Lam Suet 분), 췽모우(조지성 - 趙志誠 / Chiu chi Shing), 해결사 페이게이(장가휘 분), 깡패보다 사업가가 되길 원하는 지미(고천락 분), 여기에 이들의 가족, 홍콩 경찰, 중국 공안까지 스무 명이 넘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4. 신들린 연출
이렇게나 많은 인물과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흑사회>는 전혀 혼란스럽거나 산만하지 않다. (아마도 이것이 왕가위 영화를 편집한 담가명(譚家明 / Patrick Tam Kar Ming)을 초빙한 이유일 듯) 이점 하나 만으로도 두기봉과 밀키웨이팀이 전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필름메이커 중 하나란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쇼트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느껴진다. <흑사회>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해 오면서도 안주하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장인의 영화다. 그래서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부글부글 끓는 에너지와는 반대로 베테랑 운전기사의 차를 탄 것 같은 안정감이 있다.
화면 역시 시종일관 안정되어 있다. 핸드 헬드 촬영이 거의 없다. 카메라는 제 자리에 멈춰있거나, 트랙을 따라 움직인다. 실내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스크린의 사각형 화면에 맞게 정사각형, 직사각형 구도의 프레이밍을 유지한다. 이것이 영화에 어떤 권위, 질서,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을 부여한다. 반면 따이디가 원로들을 목상자에 담아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장면, 용두곤을 두고 벌이는 노상격투씬, 마지막 충격의 반전 시퀀스 등 심각한 폭력은 통제불가능한 야외 공간에서 벌어진다. 여기에 바람소리, 물소리 등의 자연음향을 깔아 폭력이 인간사회, 더 나아가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가장 절묘하다 생각되는 연출은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거리다. 두기봉은 인물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혹은 너무 멀리 있지도 않은, 스토리에 딱 맞는 거리를 찾아냈다. 굉장히 뜨거운 이야기임에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5. 산다는 것
인생 경험은 영화를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준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두기봉이 연출한 스토리, 캐릭터, 스릴, 유머, 아이러니를 즐기기에 바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영화를 다시 보니 인간 사회를 체념과 절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두기봉의 슬픔 같은 게 엿보인다. 혼자만의 감상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 홍콩사람들과 살아가야 하는 비애(悲哀)로 가득하다. <흑사회>는 가장 로컬 한 소재를 다루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흑사회>는 2부작 중 전편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완결성이 있다. 2편도 훌륭하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1편이다.
'영화 >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클래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티 해리(Dirty Harry) 1971년 - 악마 경찰 (0) | 2024.07.28 |
---|---|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2003년 - 3부 진혼곡 (2) | 2023.11.09 |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2003년 - 2부 사라진 시간대 (0) | 2023.10.20 |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2003년 - 1부 거대한 비극 (0) | 2023.07.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