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틱 리버>는 잔잔한 강물처럼 시작했다 어느 순간 바닥이 어딘지 모를 비극의 심연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삶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고, 교과서에 쓰인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음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잠깐 한눈팔면 누구라도 냉혹한 운명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보스턴의 한 동네에서만 대부분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 같은 장대한 서사 에픽을 본 것 같은 감동이 있다. 데니스 르헤인(Dennis Lehane)의 동명 소설과 브라이언 헬겔랜드(Brian Helgeland)의 각색이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스트우드의 과묵한 연출이 이 영화를 거대한 비극으로 만들었다. 관객이 이야기를 못 따라갈까 노심초사하는 보통의 감독과 달리 이스트우드는 중요한 장면일지라도 거침없이 생략한다. 대사 보다 침묵을, 보여주는 것보다 안 보여주는 쪽을 선택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미스틱 리버>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여러 번 봐도 지겹지 않고, 그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인다. 우리는 이런 영화를 걸작, 혹은 클래식이라 부른다.
겉치레를 못견뎌 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는 항상 최단거리로 목표점에 도달한다. 불필요한 것은 최소화하고 필요한 장면(그의 영화사 말파소 프로덕션(A Malpaso Production)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오래된 제작사 중 하나지만 로고 영상이 없다. 이스트우드 영감은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다)만 찍는다. 대신 영화의 템포는 그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이야기의 힘과 배우, 그리고 자신의 본능에 의지해 뚜벅뚜벅 걷는다. <미스틱 리버>는 이스트우드 영화의 정수다. 제작비의 규모, 장대한 스펙터클, 정교한 CG, 화려한 액션은 영화의 감동과 무관하다는 것을 이 영화로 또 한번 입증한다.
기초 정보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24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2003년 10월 15일(북미) 개봉했다. 제작비는 2천5백만 불로 추정되는데, 흥행수익은 제작비의 다섯 배가량되는 1억 5천6백만 불을 기록했다.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주연상(숀 펜 / Sean Penn)과 남우조연상(팀 로빈스 / Tim Robbins)을 수상했다.
스태프들은 언제나 그렇듯 이스트우드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편집의 조엘 콕스(Joel Cox), 프로덕션 디자인의 헨리 험스테드(Henry Bumstead), 스턴트 감독 버디 반 혼(Buddy Van Horn)은 감독 이스트우드의 오랜 영화동지이며, 톰 스턴(Tom Stern)은 1982년작 <홍키통크 맨(Honkytonk Man)>에서 개퍼로 출발해 이스트우드가 2002년작 <블러드 워크(Blood Work)>를 제작할 때 직접 촬영감독으로 입봉 시킨 인물이다. 마치 강물처럼 영화 전반에 깔리며 비극성을 한층 강조하는 음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의 솜씨다.
비극의 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범죄 스릴러는 아주 높은 곳에서 무심히 도시를 내려다 보는 헬기 쇼트가 반드시 등장한다. 이런 장면은 이스트우드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헬기에서 바라본 지상의 풍경은 무력감을 가져다준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범죄가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 이스트우드에겐 더러운 세상이 디폴트다. 이걸 인정하고 나면 '여기서 나는 어떻게 살아 남아야 하는가, 혹은 스스로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란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스트우드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다. <미스틱 리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미스틱 리버> 오프닝 역시 부감 쇼트다. 하지만 이번엔 높이가 좀 다르다. 헬기가 아니라 크레인 쇼트 정도의 높이다. 그래서 헬기에서처럼 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없다. 시야는 주택들에 가려진다. 그 보이지 않는 사각의 공간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고하지 않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에 불행이 스며드는 것처럼 장면을 연출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동네에서 공놀이를 하던 꼬마 지미, 션, 데이브가 아동성애자들의 표적이 된다. 동네 아저씨 둘이 근처 집 현관에 나와 시덥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던 중에 이런 일을 당했다. 불행은 이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가장 약한 피해자를 노린다. 차를 타고 온 아동성애자는 형사인 것처럼 접근해 아이들을 혼낸다. 고작 덜 굳은 시멘트에 이름을 새긴 것을 갖고 말이다. 그의 목적은 아이들 중 하나를 차에 태우는 것이었다. 지미와 션은 집이 코 앞이라 타깃에서 제외됐고, 살짝 떨어진 곳에 살던 데이브가 총대를 메고 차에 탄다. 데이브의 영혼은 이 일로 인해 송두리채 파괴된다. 영화는 데이브가 정확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지하실에 갇혀 그만하라고 애원하는 모습, 죽어라 도망치는 모습 이렇게 두 씬뿐이지만 충분히 잔인하다.
원작소설의 작가 데니스 르헤인은 어릴 적 실제로 낯선 어른의 차에 탔다가 어머니에게 크게 혼난 적 있는 과거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설정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차 조수석에 앉은 백발노인은 데이브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내미는데, 손가락에 신부 반자가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촬영 당시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보스턴 대교구의 성직자 아동성추행 스캔들이 연일 보도를 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사건은 2015년 개봉한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자세히 다뤄진다.
<스포트라이트>와 <미스틱 리버> 사이에 재미있는 인연이 또 하나 있는데, 원래 형사 션 역으로 마이클 키튼(Michael Keaton)이 캐스팅 되었다. 시나리오 리딩에 경찰들과 함께 근무하며 사전 준비까지 다 마친 상태였는데 촬영을 앞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크게 한번 갈등을 빚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키튼이 하차하고, 이스트우드는 평소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해왔던 케빈 베이컨(Kevin Bacon)에게 SOS를 쳤다. 마이클 키튼은 한참 후 <스포트라이트>에서 보스턴 글로브 탐사보도팀의 월터 역을 맡게 된다.
길지 않은 프롤로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 잔뜩 담겨있다. 처음 아이들은 하키 놀이를 하는데 하필 데이브가 친 공이 하수구에 빠진다. 데이브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시멘트에 이름을 새기는 장면에서 지미와 션은 자기 이름을 완성하지만, 데이브는 'Da'만 쓰다 끌려간다. 살아 돌아온 뒤 지미와 션은 집 창문 너머 보이는 데이브를 바라본다. 션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데, 데이브는 어두운 방에 있어 표정을 알아볼 수 없다. 이 순간부터 지미&션과 데이브는 영원히 갈라진다. 이 프롤로그 이후 25년 후의 데이브(팀 로빈스 / Tim Robbins)가 아들과 함께 자신이 유괴당한 거리를 걷는 장면으로 연결되는데, 이 편집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장치 없이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데이브에게 그때의 일은 현재진행형임을 알 게 해 준다.
※ 2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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