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전화를 걸어 <미스틱 리버>가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전할 때가 집행위원장을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순간이라 회고했다. 왜 아니겠나. <미스틱 리버>는 곱씹을수록 대단한 영화다. 영화의 감동이란 게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옅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스틱 리버>는 반대다. N차 관람을 할수록 영화의 정서적 울림이 커진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 성인이 된 데이브(팀 로빈슨 / Tim Robbins), 지미(숀 펜 / Sean Penn), 션(케빈 베이컨 / Kevin Bacan)을 차례로 소개하는 장면이 그렇다. 단순한 인물 소개 장면 같은데도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그 해석의 여지는 이스트우드 특유의 화법에서 비롯된다. 그 화법이란 침묵과 생략이다. <미스틱 리버>에서 이스트우드는 과거에서 단숨에 25년을 건너뛴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단호하게 생략한다. 관객은 현재의 장면들을 보며 사라진 시간대를 유추할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해지고, 영화는 보다 깊고 풍부해진다.
상이용사
비극적인 프롤로그가 끝나고 영화는 25년 후의 현재로 돌아온다. 이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장치 - 예컨대 '몇 년 후' 같은 자막을 달거나 색조에 변화를 주는 방식 등 - 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크레인의 도움을 받은 카메라가 멀리 한번 쳐다보고, 다시 지상 가까이 내려와 어른이 된 데이브를 비출 뿐이다. 데이브는 아들과 함께 거리를 걷는다. 동네는 예전과 변함이 없다. 하키 공을 삼켰던 하수구 구멍도 그대로다. <미스틱 리버>에서 이스트우드는 크레인 쇼트를 시퀀스와 시퀀스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한다. 냉혹한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이 영화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데이브는 어째서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꾸부정한 걸음걸이에 음침한 표정의 데이브는 좀비처럼 보인다. 데이브는 자신의 몸에 비극을 그대로 짊어지고 동네를 배회한다. 그날을 기억하는 션, 지미, 혹은 동네 사람들에게 데이브의 존재는 전쟁의 비극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상이용사와도 같다. 외면하고 싶은 존재다.
어리석은 아버지
한때 거친 삶을 살았던 지미는 노안 안경의 도움을 빌어야 전표 속 숫자를 볼 수 있는, 중년의 잡화점 사장이 되어 있다. 지미에게는 장성한 딸 케이티(에미 로썸 / Emmy Rossum)가 있다. 케이티는 가게에 아빠를 보러와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진다. 케이티는 친구들과 오늘 늦게까지 놀 거라고 통보를 하고, 아빠 지미는 내일 어린 동생의 영성체 예식이 있으니 꼭 참석하라 당부한다.
영화를 처음 볼 때 케이티가 오히려 아버지 지미보다 더 어른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티가 남다른 감정을 실어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반면 지미는 영수증 정리하느라 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다. 작지만 밀도가 굉장히 높은 장면이다. 숀 펜과 에미 로섬의 연기에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의 결말을 알면 이 장면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케이티의 경우, 지금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케이티는 남자친구 브랜든과 미래를 약속하고 아버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미의 경우, 이때 이후 두 번 다시 살아있는 케이티를 볼 수 없다.
가게에서 나온 케이티는 차에 몰래 숨어있던 남친 브렌든(톰 가이리 / Tom Guiry)과 아버지의 눈을 피해 밀어를 나눈다. 아버지 지미는 브랜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브랜든도 지미를 두려워한다. 두 사람은 허락받지 못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케이티가 아버지 지미에게 브랜든과의 관계를 실토하는 순간, 지미는 아무도 몰래 브랜든을 끌고 가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케이티가 부모 몰래 야반도주를 결심한 이유다. 지미는 브랜든을 왜 그토록 싫어하는가. 그것은 브랜든 탓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지미가 저지른 죄 때문이다. 케이티가 차를 몰고 동네를 빠져 나갈 때, 카메라는 또다시 위로 올라가 멀어져 가는 자동차와 유유히 흐르는 강(江)을 한 화면에 담는다.
우울한 형사
지미, 데이브와 함께 놀던 션은 성장해 형사가 되었다. 션의 직업이 형사인 것은 의미심장 하다. 그때 데이브를 노린 범인은 형사를 사칭했었다. 나쁜 어른 대신 진짜 형사가 된 션은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좌절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6개월 전, 부인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 매일 전화를 걸어 아무 말 없이 수화기 들고 있기를 반복한다. 동료 형사 파워스(로렌스 피쉬번 / Laurence Fishburne)는 부인이 션의 사과를 기다리는 게 아니냐 말한다.
션은 사과를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다. 부인이 왜 자신을 떠났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션이 겪고 있는 막막함은 세 친구의 관계와도 연결된다. 그 사건 이후 세 친구는 이전처럼 동네에서 하키 놀이를 하며 지냈을까? 모르긴 해도 그들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을 것이다. 어른 션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은 고가도로 위가 배경이다. 이스트우드의 주인공답게 과묵한 션은 다리 건너편 옛 동네를 말없이 응시한다. 데이브와 지미는 아직 거기 있고, 션은 여기에 있다.
※ 3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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