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감독과 작가는 한 시퀀스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지 않는다. 동시에 여러 개의 테마를 연주한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장면이다.
1. 복잡다단
샘(로브 로우 / Rob Lowe)과 조쉬(브래들리 휘트포드 / Bradley Whitford)는 경제 자문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비서실장 리오(존 스펜서 / John Spencer)가 나오자 득달같이 달려가 보고를 한다. 샘은 허리케인의 이동경로가 플로리다를 지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앞서 비서진들은 쿠바 난민들이 탄 뗏목이 플로리다 앞바다에 나타나면 여기 선거구를 잃게 될 것이라 걱정한 바 있다. 한편 조쉬는 대통령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로이드 러셀 의원의 심상치 않은 행보를 알린다. 리오는 로이드 러셀이 대통령을 위협할 만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홍보 전문가 맨디(모이라 켈리 / Moira Kelly)가 러셀 의원 캠프에 합류했다는 조쉬의 첨언에 다급하게 대책을 주문한다. 맨디란 인물이 리오가 긴장할만큼의 능력자라는 뜻이다.
아직도 시퀀스는 끝나지 않았다. 조쉬와 리오가 대화할 때, 먼저 보고를 끝낸 샘이 프레임에서 아웃되지 않고, 풍경처럼 화면 뒤에 머물러 있다. 왜 저러고 있을까? 궁금증은 이내 풀린다. 리오가 급히 자리를 떠나면 샘과 조쉬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공교롭게 둘다 어제 셔츠를 입고 있다. 샘은 묘령의 여인과 밤을 보냈고, 조쉬는 웨스트 윙에서 밤을 샜다. 로브 로우와 브래들리 휘트포드는 현타에 빠진 듯 머쓱한 웃음을 나누고 헤어진다.
2. 라이벌의 등장
문제의 맨디가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숏 커트가 잘 어울려 한창 때의 맥 라이언이 떠올랐다. 맨디는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바틀렛 캠프에서 홍보 전략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웨스트 윙 비서진의 동료이자, 조쉬의 연인이기도 하다. 그랬던 맨디가 러셀 로이드 의원의 선거 캠프에 합류하며 워싱턴으로 컴백한다.
이제 라이벌이 된 맨디와 조쉬가 레스토랑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한다. 둘의 해후 장면은 스크류볼 코미디처럼 연출되었다. 이 장면에서 남녀가 주고받는 대사는 쿵후영화에서 무술 대결과 다를 바 없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게 쿵후영화라면, 스크루볼 코미디는 말과 말이 충돌한다. 맨디는 백악관에서 잘리면 이쪽으로 넘어오라 제안하며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조쉬에게 먼저 잽을 날린다. 공격을 받은 조쉬는 맨디가 의원을 ‘러셀’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맨디가 로이드 의원과 사귀고 있음을 눈치챈다. 되치기를 당한 맨디는 황급히 뉴욕타임스 여론조사 결과로 화제를 전환한다. 아직 결과가 공개되지 않은 이 조사에서 로이드 의원의 지지율이 48%로 급등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 큰 걸림돌이 생긴 것이다. 조쉬와 맨디는 몇 번씩 공수를 바꿔가며 말싸움을 한다. 그러나 조쉬가 맨디를 바라보는 눈빛, 그 촉촉한 시선이 멜랑코리한 분위기를 만든다. 조쉬는 아직도 맨디를 사랑한다.
3. 곤경에 빠진 샘
같은 시각, 샘은 갑자기 추가된 일정에 머리가 아프다. 비서실장 리오의 딸이 이번 주말 백악관 견학을 오는데, 샘이 에스코트를 맡게 됐다. 리오의 부인이 직접 샘을 지명했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때 샘의 삐삐에 모르는 번호가 찍힌다. 전화를 해 보니 에스코트 에이전시다. 어젯밤을 함께 보낸 로리가 고급 콜걸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샘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자칫하면 백악관발 섹스 스캔들로 커질 수 있다. 조쉬가 설화로 힘든 와중에 샘의 사생활까지 폭로되면 정권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4. 노련한 협상가
한편, 리오는 남몰래 기독교 단체의 대표 알 콜드웰(F. 윌리엄 파커 / F. William Parker)과 비밀 회동을 갖는다. 콜드웰은 조쉬의 일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낙태 금지의 입법화를 요구한다. 대통령은 기독교 단체를 의식, 정치적인 신념과는 달리 개인 자격으로 8개월째 낙태 반대 캠페인에 참여 중이었다. 리오는 이 점을 강조하며 콜드웰의 요구가 무리한 것임을 항변한다. 그러자 콜드웰은 백악관이 아무 것도 내 놓지 않느다며 소리를 높인다.
사실 대통령은 오늘 아침 기독교계의 요구대로 조쉬의 경질을 결심했었다. 이를 막은 게 리오였다. 지금까지도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콜드웰은 조쉬의 고백을 듣고서야 백악관의 입장을 이해하며 한발 물러선다. 나는 둘의 대화장면이 소름끼치게 좋았다. 민주당 정권의 2인자와 보수 기독교계의 대표가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논쟁을 하는 모습, 그 자체가 현실에선 좀체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 4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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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것이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가며 찍은 롱 테이크 쇼트다. 바쁘게 돌아가는 백악관의 하루와 정보량 많은 대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최적의 수단이다. 다만 이런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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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수습을 위해 기독교 단체 대표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는데 이 자리에서 더 심각한 대립이 생긴다. 갈등 지수의 그래프가 순간적으로 높이 치솟고, 바로 그때 대통령 바틀렛(마틴 쉰 /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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