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초반부, 로버트 래쓰가 타깃의 등에 총을 겨누고 늪지로 걸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어쌔신>은 두 인물이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가 반복 등장한다. 한 사람은 카메라를, 다른 이는 앞선 자의 뒤를 바라본다. 같은 레인에 먼저 출발한 이와 늦게 출발한 자가 서 있는 듯한 구도다. 익을 때로 익은 베테랑과 그를 따라잡으려는 신인(新人)의 구도이기도 하다. 누구나 정점에 이르면 꺾어질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자리는 후배가 차지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60대 중반에 이른 할리우드의 장인(匠人) 리처드 도너는 <어쌔신>을 찍을 무렵 곧 다가올 하강의 곡선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제1 라운드
<어쌔신>은 No.1 킬러 로버트 래쓰(실베스터 스탤론)과 청부업계의 떠오르는 신흥강자 미구엘 베인(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대결이 중심 축이다.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둘의 첫 대결은 영화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펼쳐지는데, 그 장소는 장례식이 한창인 공동묘지가 되겠다. 동생 장례식에 참석한 억만장자 앨런 브랜치를 저격하기 위해 로버트 래쓰는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팔 깁스(만화 <시티 헌터>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각본을 쓴 워쇼스키 자매가 일본 아니메의 광팬이니 오마쥬나 인용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에 숨겨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목표을 조준하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을 때, 멀리서 날아온 총탄이 앨런 브랜치의 가슴을 꿰뚫는다. 다른 이가 먼저 죽인 것이다.
이중의뢰인가? 아니면 누군가 로버트의 의뢰를 중간에 가로챈 것인가? 일단 상대부터 잡아야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는 곧바로 수상한 묘지 인부를 발견하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자 또한 로버트를 향해 응사를 시작한다. 바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미구엘 베인이다. 총격전 도중 경찰에 포위당한 미구엘은 미련없이 총을 버리고 항복한다. 미구엘은 수갑이 채워져 경찰차에 실린다. 로버트는 뒤따라 가기 위해 급히 차에 오르는데, 이때 미구엘이 탄 경찰차가 로버트 옆에 잠시 정차한다. 로버트는 이때 미구엘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고, 미구엘은 옆 차에 탄 로버트를 못 보고 지나간다. 로버트가 시동을 걸 때 구급차가 들어오는 바람에 지체하게 된다. 멀어지는 경찰차를 보며 애가 탄다. 추격전을 찍는 감독은 이처럼 주인공을 지체시키는 데 통달해야 한다. 바로 쫓아가면 재미없다.
미친놈, 미구엘 베인
전문 살인청부업자를 경찰차에 태울 땐 절대 뒷자리에 혼자 놔두면 안 된다. 미구엘은 엄지손가락을 탈구시켜 수갑에서 손을 빼낸다. 미리 시뮬레이션이라도 해 본 듯, 여유만만하게 창문을 발로 깬 다음 운전석의 경찰 목을 조른다. 혼란의 와중에 차는 전복되고, 미구엘은 자기 총까지 되찾아 지원하러 온 경찰 둘까지 처치한다. 무전기로 경찰 통신을 엿들은 로버트가 현장으로 달려왔을 땐 미구엘이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 다음이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단순한 동작 하나도 호들갑을 떤다. 총격전을 연기하면서 이렇게 호흡을 많이 쓰는 - 애 낳는 줄 알았다 - 배우는 처음 봤다. 리처드 도너 감독의 <리썰 웨폰>시리즈는 미친놈이 주인공인 영화 중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멜 깁슨이 연기한 마틴 릭스는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호감 가는 미친놈이었다. <어쌔신>의 반데라스는 그냥 미친놈, 그 자체다. 스탤론이 70년대 첩보영화 속 주인공처럼 트랜치 코트를 입은 신사 같은 캐릭터라면, 반데라스는 사이코패스에다 자기과시욕이 넘치는 인물을 연기한다. 신세대를 이해 못 할 괴물로 그리는 건 동서양을 떠나 나이 든 사람의 공통된 본능인가.
제 2 라운드
이대로 놓치는 가 싶지만 로버트는 No.1 킬러답게 미구엘을 따라잡는 데 성공한다. 택시를 훔쳐 그 택시에 미구엘을 승객으로 태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의심하지 말자. 우연과 비약, 물리법칙의 위배가 <어쌔신>을 범작으로 만들었단 것만 기억하자.
택시는 강도를 보호하기 위해 뒷좌석과 운전석 사이에 방탄 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로버트 래쓰와 미구엘 베인은 이렇게 서로 분리된 가운데서 대결을 펼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두 사람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구도에서 말이다. 처음 시작은 미구엘을 택시에 태운 로버트가 주도권을 쥔다. 그는 끊임없이 미구엘에게 말을 건다. 괜히 시비를 걸어 말싸움을 한 뒤 하차를 요구한 뒤 미구엘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뒤에서 총을 겨눈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미구엘이 택시 영업증이 없는 것을 본 뒤로 상황이 바뀐다. 수상함을 감지한 미구엘이 총을 빼들고, 두 사람은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오우삼 스타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둘 다 먼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이때 미구엘은 도로 건너편 야구장에서 시합중인 소년들에게 총구를 돌린다. 로버트가 출발하지 않으면 무작위로 쏘겠다고 위협한다. 로버트는 할 수 없이 총을 집어넣고 시동을 건다. 무고한 사람을 해치기 싫어하는 킬러 나니 웃기지 않은가? 미구엘은 묘지에서도 경찰이 다칠까 봐 제대로 총을 쏘지 않았다며 약한 마음을 비웃는다. 주도권은 다시 미구엘에게로 넘어간다. 감독 리처드 도너는 택시라는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잡는다. 두 사람의 얼굴만으로 스크린이 꽉 찬다. 살벌한 대화가 이어지다 미구엘이 운전하는 로버트의 뒷통수에 대고 진짜 총을 쏜다. 관객이 깜짝 놀랄만한 장면이다. “방탄유리라도 확인은 해봐야지?”
미구엘의 광기어린 행동은 수위가 높아진다. 방탄유리 때문에 차 안에서의 공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리창을 내린 다음 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운전석의 로버트를 쏘려 한다. 로버트는 기다렸다는 듯 옆 차선의 대형버스 쪽으로 차를 바싹 붙인다. 미구엘은 버스 차체에 몸이 갈리고 총도 놓친다. 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는 게 함정. 이 미친듯한 스턴트 장면은 아마도 세트 촬영분과 야외 촬영분을 복잡하게 이어 붙인 것이 틀림없다. 리처드 도너는 <리썰 웨폰> 시리즈의 카 체이스 장면에서도 스크린 프로세스를 즐겨 사용했다. 차 안에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의 연기가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도너는 운전자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고 카메라를 살짝 흔든다. 그럼 후면에 영사되는 배경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킬 수 있다. 큰 스크린으로 보면 감쪽같다.
둘의 도로 위 사투가 경찰의 관심을 끌게 되며, 이제 헬기까지 동원된 보다 큰 스케일의 추격전으로 전환된다. 로버트가 경찰의 추적을 떼어 내는 데 집중할 동안, 미구엘은 편히 뒤에 앉아 로버트와 니콜라이의 과거를 언급한다. 알고보니 미구엘은 로버트 래쓰의 광팬이라 해도 좋을만큼 많은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몰랐다는 게 함정)을 알고 있다. 15년 전 최고의 킬러는 니콜라이 타슈링코프였다. 로버트는 니콜라이와 절친이었는데도 니콜라이 암살 의뢰를 수락했다. 넘버 원이 되고 싶어 수락을 했다는 게 미구엘의 해석!
과거 이야기로 로버트의 집중을 흩트리는 데 성공한 미구엘은 대형 트레일러 옆을 지나갈 때 차문을 열고 뛰어 내린다. 경찰 헬기의 눈까지 피하는 절묘한 타이밍의 탈출이었다. 혼자 남은 로버트는 네비게이션을 통해 택시 차고지가 근처에 있음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쉰다. 경찰 헬기가 위에서 차고지를 내려다 보면 온통 노란 택시 투성이라 구분이 안된다. 카메라는 다른 기사들과 섞여 있는 로버트를 바라본다. 중간에 차 한대가 카메라의 시야를 가리고 지나가면 로버트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오우삼 감독이 <첩혈쌍웅> 등에서 주윤발의 신출귀몰한 모습을 연출할 때 즐겨 사용했던 바로 그 수법이다.
※ 3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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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멜 깁슨이 본인 연출작으로 검토하던 프로젝트였다. 시나리오가 물건이라며 리처드 도너에게 소개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에 전념하다보니 자연스레 도너가 연출을 맡게 되었다. 실베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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