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남자 주인공 로버트 래쓰와 여자 주인공 일렉트라, 그리고 악당 미구엘의 트라이앵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킬러와 타깃으로 만난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공동의 적과 싸우는 구조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줄리안 무어 간의 케미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액션과 드라마 모두 클리셰의 굴레로 빠져든다.
호텔 대격돌
일렉트라와 래미 패거리가 선금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중에 미구엘 베인이 권총을 들고 래미 패거리가 모여 있던 718호로 돌진한다. 동시에 로버트는 일렉트라가 있는 542호로 달려간다. 두 명의 킬러가 각각 구매자와 판매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둘이 어떻게 래미와 일렉트라의 호실 번호를 알게 됐는지 영화는 자세히 다 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개연성을 위해 만든 이 장면들이 영화의 재미를 다 깎아 먹는다. <어쌔신>은 이벤트와 이벤트를 연결하는 이음부가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영화 전체를 헐겁게 만든다.
미구엘은 718호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래미 일당을 습격, 모조리 죽여 버린다. 알고 보니 래미 일당이 일렉트라를 체포해 기밀 정보를 회수하려는 FBI였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래미 일당의 정체는 영화의 스토리 전개에서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한편 미구엘은 구매자인척 하고 일렉트라와 통화를 시도하는데, 일렉트라는 음산한 미구엘의 목소리를 듣고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는다. 도망치려 하지만 로버트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계속 통화가 연결되어 있던 탓에 미구엘과 로버트가 다시 한번 조우하여 신경전을 펼친다. 미구엘은 판매자, 즉 로버트가 죽여야 할 대상이 미모의 여인이란 것도 눈치챈다. "여자를 죽이는 건 쉽지 않지." 미구엘이 로버트를 자극할 때, 화면은 총을 뽑아 든 로버트와 겁에 질린 일렉트라를 번갈아 잡는다. 이 장면을 위해 제법 긴 분량의 호텔 시퀀스가 존재한다. 로버트는 일렉트라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천만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할리우드 주류영화에서 그런 짓을 할리 없다. 한발 늦게 542호실로 달려온 미구엘은 텅 빈 방을 보며 로버트를 비웃는다. 인정을 베푸는 킬러는 이미 무뎌진 칼이다.
일렉트라를 잡아라!
액션의 무대는 호텔에서 벗어나 길거리, 그리고 일렉트라의 아파트로 옮겨간다. 이 과정 역시 매끄럽지 않다. 킬러 로버트에 붙잡혀 함께 차로 이동 중이던 일렉트라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한다. 로버트와 미구엘은 일렉트라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 대목 역시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다. 다 부질없는 장면들이다. 결국 핵심은 일렉트라의 집에서 로버트 래쓰와 미구엘 베인이 맞붙는 총싸움이다.
짧지만 긴박한 이 시퀀스는 미러 샷을 사용해 두 킬러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 미장센이 근사하다. 미구엘의 공격이 거세지자 로버트는 주방의 가스 배관과 위스키 한 병을 이용해 집을 폭파시키는데, <리썰 웨폰> 시리즈를 통해 이런 장면을 수도 없이 연출했던 리처드 도너의 매너리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거대한 화염이 솟구치자 미구엘은 탁자를 들어 몸을 방어하는데,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미구엘은 폭풍에 5층 창문을 뚫고 바닥에 쳐 박히고도 무사히 살아 도망친다. 창틀 위로 불길이 치솟는 중에 주연배우 스탤론이 직접 고개를 내밀고 '미구엘' 반데라스를 찾는 장면에선 베테랑 액션배우 다운 아우라가 오랜만에 느껴진다.
교감
꽤나 길었던 추적 & 액션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숨을 잠시 고른다. '킬러' 로버트 래쓰와 '도둑' 일렉트라가 서로 가까워 질 시간이 된 것이다. 호텔방에 마주 앉아 서로를 탐색하던 남녀는 죽일 듯이 으르렁대다 - 심지어 일렉트라는 총으로 래쓰를 쏘기도 한다 - 결국 서로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연기 잘 하기로 소문난 무어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장면이다. 분명 열연을 펼쳤는데도 무어와 스탤론 사이에 그 어떤 스파크도 튀지 않는다. 반면 두 배우가 어떤 대사도 치지 않고, 공간을 점하고 있을 때는 분위기가 그럴듯하다. 긴 하루가 지나고, 래쓰가 일렉트라에게 침대를 쓰게 하고 자신은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때, 침대의 일렉트라를 후경에 두고 화면 앞 스탤론에게 실내등 조명을 비추어 만든 미장센은 멋지다. <어쌔신>에서 리처드 도너가 주력한 이미지 -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앞 뒤로 서 있는 - 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한편 미구엘은 욕조에 상처로 가득한 몸을 담그며 아픔을 삭이다, 랩탑을 켜서 의뢰인과 채팅을 시도한다. 미구엘은 구매자를 죽였으니 돈을 달라 요구하는데, 의뢰인은 정보가 담긴 디스크까지 회수해야 임무 완수라며 대금 지급을 불허한다. 이에 열받은 미구엘이 망치로 치는 듯 키보드를 두들기며 'Fuck you'로 채팅방을 도배를 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이 장면에서 대단한 솔로 연기를 펼쳤지만 에너지 과잉으로 인터넷상에서 놀림거리가 됐다.
합작
래쓰와 일렉트라는 하루 만에 의기투합, 함께 동업을 시작한다. 둘이 주고받는 눈빛만 보면 10년 넘게 함께 일한 사이처럼 보인다. 래쓰는 의뢰인과 연락해 흥정을 시도한다. 입수한 디스크를 넘기는 대신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거래 장소는 시애틀 도심을 가로지르는 경전철 플랫폼!! 중간 정차역에서 내려 디스켓과 돈가방을 교환하고 각자 흩어지면 된다. 래쓰가 직접 기차를 타고 거래에 나서고, 일렉트라는 자동차로 모노레일을 따라가며 후방지원을 한다. 디스크를 넘기고 돈가방을 챙긴 래쓰는 다시 기차에 오른다. 래쓰는 승객 중에 수상한 자가 따라붙은 것을 눈치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래쓰는 달리는 열차를 비상 정지 버튼을 눌러 멈춰 세운다. 열차가 정지하자, 래쓰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철로 교각 위로 뛰어내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도움닫기 해 건물 옥상 위로 점프하여 미행을 떨쳐낸다.
이 장면은 몹시도 위험하고 대단한 스턴트다. 파쿠르 전문가가 해도 위험한 장면이 아닐까. 높은 곳에서의 프리 점프가 주는 쾌감이 상당하다. 우리는 스탤론이 성룡이 아닌 이상, 이 장면이 스턴트맨의 동작임을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점프 후 다른 앵글로, 옥상 바닥에 낙법을 걸며 착지하는 스탤론의 동작만큼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연결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래쓰는 돈가방을 무사히 챙겨, 미리 대기 중인 일렉트라의 차에 탄다. 기분 좋게 돈가방을 확인하려는 데 이상한 전자음이 들린다. 의뢰인이 지폐다발 밑에 폭탄을 넣어 둔 것이다. 두 사람은 재빨리 인적 없는 뒷골목 쓰레기통에 폭탄 가방을 던지고 전속력으로 액셀을 밟아 탈출한다. 오늘 하루 래쓰의 대행동은 쓸모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일렉트라는 이런 일을 대비해 미리 디스크를 진짜와 바꿔치기해 두었다. 이제 두 사람은 진짜 디스크를 가지고 의뢰인과 또 한 번의 협상에 돌입한다.
※ 5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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