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의 마지막 대결장소는 폐허가 된 호텔건물 안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냉전 시대가 낳은 국제적 킬러들이 자존심, 돈을 걸고 싸움을 한다.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이 집약된 장면이고,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의 앞과 끝만 이런 분위기이고, 대부분의 장면들은 <리썰 웨폰>, <다이 하드>, <스피드> 같은 스타일이었다는 게 <어쌔신>의 패착이다.
마지막 라운드
로버트 래쓰는 의뢰인에게 일렉트라가 훔친 디스크를 넘기는 조건으로 바하마 제도의 한 은행 비밀계좌로 2천만불을 송금해 달라고 요구한다. 본인도 반신반의한 거액이었지만 의뢰인은 흔쾌히 제안을 받는다.10년전 래쓰는 바로 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는 니콜라이를 저격했다. 과거는 반복된다. 의뢰인은 미구엘에게 래쓰의 청부살인을 지시하고, 현재의 래쓰는 과거의 니콜라이와 같은 처지가 되고, 미구엘은 과거의 래쓰와 같이 은행 앞을 조준경으로 살필 것이다. 이제 영화는 바하마 제도로 무대를 옮긴다.
폐허가 된 호텔
은행 근처 폐건물 앞에 택시가 멈춰 선다. 관광객 같은 차림의 래쓰와 일랙트라가 그 안에서 내린다. 화재로 폐허가 되어 버린 호텔 건물. 10년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고, 수리하겠다 나서는 이가 없어 흉물스럽게 변했다. 리처드 도너 감독의 카메라는 주인공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계단이 삭아 털썩 주저앉기도 하는 위험천만한 이 건물이 <어쌔신>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된다.
래쓰는 친구 니콜라이를 저격했던 바로 그 장소로 가서 과거를 돌아다 본다. 내일 래쓰는 니콜라이가 그랬던 것처럼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와야 한다. 미구엘 역시 이 곳에 자리를 잡고 래쓰를 조준할 것이다. 창문에서 래쓰와 일렉트라를 찍은 장면은 이제껏 반복됐던 '한 곳을 동시에 보고 있는 인물 샷'이다.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을 보여준다. 선배와 후배, 선행자와 후행자...리처드 도너 감독이 <어쌔신>에서 강조하려 한 장면이다.
작은 사건
그날 밤, 일렉트라는 함부로 돌아 다니지 말라는 래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례 행렬을 따라 나갔다가 미구엘을 마주친다. 밤, 이방인들의 축제, 그 속에서 살인자에 쫓기는 일렉트라를 보여주며 긴장감을 만든다. 거의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로버트 래쓰가 나타나 일렉트라를 구해준다. 여성 캐릭터는 철없이 위험을 자초하고, 남자는 이런 여성을 구한다는 액션영화의 오랜 클리셰의 반복이다. 또한 클라이막스로 가는 동안 작은 이벤트를 배치해 지루함을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킬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운명의 날이 다가온다. <어쌔신>의 하일라이트이자 모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저격 시퀀스가 시작된다. 예정된 대로 로버트 래쓰는 은행으로 걸어 들어간다. 미구엘은 래쓰가 예측한 그대로, 폐허가 된 호텔방에서 저격용 라이플을 들고 그가 은행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10년전 래쓰가 니콜라이를 쏜 그날의 반복, 재현이다.
은행은 갑자기 나타난 고객의 2천만불 인출 요구에 당황한다. 돈을 준비하려면 하루 종일이 걸린다. 래쓰는 경험으로 이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 래쓰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은행 안에서 편안하게, 단지 약간의 지루함만 견디면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리 없는 미구엘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래쓰를 기다리며, 에어컨도 없는 호텔방에서 뜨거운 햇빛을 견뎌야 한다. 시간이 갈 수록 미구엘의 집중력이 흩어져 간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미구엘은 의구심을 품게 된다. 래쓰가 아직 은행 안에 있을까? 벌써 돈을 챙겨 빠져 나간 것은 아닐까? 견디다 못한 미구엘이 호텔방을 빠져나가 은행 안으로 달려갈 때, 근처에 있던 일렉트라가 미구엘이 있던 저격 포인트로 가서 라이플을 몰래 치워버린다는 것이 래쓰와 일렉트라의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낡은 호텔방의 바닥이 문제를 일으킨다. 결정적인 순간, 일렉트라가 디딘 마룻바닥이 깨지며 오도가도 못하게 끼어버린 것. 그 사이 미구엘은 은행으로 가서 여유롭게 대기중인 래쓰와 직접 마주한다.
킬러들의 수다
래쓰를 확인한 미구엘은 다시 전력을 다해 저격 포인트로 달려간다. 바닥에 끼인 몸을 어떻게든 빼 보려는 일렉트라와 전력질주하는 미구엘이 교차되며, 관객은 일렉트라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미구엘이 돌아왔을 때 일렉트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구엘은 저격용 라이블을 들어 래쓰를 조준하고, 래쓰는 비로소 돈을 찾아 은행문을 나선다. 계속 반복해서 나왔던 10년전 저격장면의 이미지와 현재의 모습이 교차되고, 미구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길 때, 일렉트라가 나타나 뒤에서 무방비의 미구엘을 몽둥이로 공격한다. 미구엘이 쏜 총알이 빗나가고, 래쓰는 일렉트라를 구하기 위해 호텔로 달려간다.
층간 구분이 없이 위아래로 뻥 뚫린 공간에서 벌어지는 숨바꼭질같은 총격전은 보는 재미가 있다. 래쓰는 훔쳐보기의 대상이 되고, 미구엘은 숨어서 공격의 기회를 노린다. 누가 먼저 상대방을 쏠 것인가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두 사람은 육박전 끝에 딛고 서 있던 바닥이 무너지며 몇 층 아래로 추락한다. 래쓰는 별탈 없이 일어 서는데, 미구엘은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치명상을 입은 듯 보인다. 이 때 래쓰의 등 뒤로 인터넷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의뢰인이 등장한다. 그는 래쓰와 미구엘을 둘 다 제거하고 문제의 디스크를 회수하려 한다.
꼼짝없이 당할 뻔 했던 래쓰를 구해주는 것은 죽은 줄 알았던 미구엘이었다. 미구엘과 래쓰는 함께 손을 잡고 의뢰인을 살해한다. 영화 내내 서로를 향해 총을 쏴 댔던 미구엘과 래쓰가 우정 비슷한 감정을 나누는 듯한 라스트가 이어진다. 여기서 또 한번의 반전이 등장하지만 중요치 않다. 래쓰는 돈을 챙기고, 일렉트라라는 연인도 얻고, 친구를 쐈다는 죄책감에서도 해방된다. 그와 동시에 이 영화를 본 기억 또한 휘발된다.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파편적인 이미지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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