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전>에서 가장 신기한 장면은 증두시 사문공의 병사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양산박 호걸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다. 병사들이 능선을 따라 늘어선 모습이 서부영화 속 인디언을 보는 듯하다. 말 타고 산비탈을 내려올 때 서부영화 풍의 음악도 나온다. 결투장면에선 일 대 일 총싸움의 클리셰가 노골적이다. 영화 속 인물은 지극히 중국적인 협의를 말하는데, 그 영상의 표현은 할리우드 서부영화의 문법이다. 음악은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 핵심 결투장면은 일본 액션 배우가 연기한다. 영화 <수호전>을 다시 봐야 한다면 규칙도 없이 이리저리 섞인 혼종의 기묘한 매력 때문이라 말하겠다.
1. 절대 미남 연청이 도적질을 하다
관군에 끌려가는 노준의를 멀리서 지켜보는 연청. 손을 쓰기에 관군의 수가 너무 많다. 노준의를 구하려면 양산박을 찾아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한시가 급한 연청이 양산박으로 달려가던 중 갈아 탈 말값이라도 구하려 도적질을 시도한다. 마침 지나가던 나그네의 봇짐을 노리는데, 아뿔싸 이 자들이 싸움을 할 줄 안다. 연청은 벼락같은 그라운드 기술을 사용하고, 상대는 강호인이라 연청을 알아본다. 다행히 연청과 싸운 자들은 양산박 사람 '병관색' 양웅과 그의 의형제 '반명삼랑' 석수(왕종 - 王鐘 / Wang Chung 분)였다. 사정을 들은 양웅은 연청과 함께 급히 양산박으로 떠나고, 석수가 혼자 대명부로 잠입해 노준의의 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2. 반면삼랑 석수의 진가
석수가 도착해서 보니 벌써 처형 준비가 한창이다. 관병들이 쫙 깔린 형장에 족쇄를 찬 노준의가 걸어 나온다. 이제 노준의는 죽기 직전인데 석수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때 석수는 망설임 하나 없이 칼을 빼들고 형장으로 뛰어 나간다. 노준의와 일면식도 없지만 의리에 목숨을 건다. 이것이 장철이 찬양해 마지 않는 영웅의 모습이고, 까마득한 후배 감독 오우삼이 생각한 '영웅의 본색'이기도 하다.
석수를 연기한 왕종은 적룡, 강대위와 함께 장철 감독이 많이 아꼈던 배우다. 곡예를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공연을 했고, 쇼 브라더스에서 스턴트맨으로 일하다 장철 감독에게 픽업됐다. 강대위와 데뷔 스토리가 아주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사촌이다. 전설의 마계 '구룡성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특이한 이력이다.
평소 조연, 악역을 주로 맡긴 것이 미안했던 장철 감독은 1973년작 <경찰(警察 / Police Force)>을 연출하며 왕종에게 주연을 맡긴다. 배우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활동하며 감독과 제작자로도 영역을 넓혀갔다.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 1편에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전임회장 처이가이 역이 내가 기억하는 왕종의 가장 최근 모습이다. 왕종은 2021년 4월 1일, 73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
3. 송강의 의리에 노준의가 감동하다
대명부의 양중서는 노준의가 세번이나 탈출하고, 이번엔 양산박의 석수까지 난리를 피워 걱정이 태산이다. 양산박이 쳐들어 온다면 현재의 병력으로 대명부를 지켜낼 수 있을까? 증두시의 사문공에게 지원 요청을 하고 동시에 양산박의 노준의 구출 시도를 단념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사건으로 성내의 경비가 삼엄해진 가운데 송강이 직접 대명부로 잠입한다. 그는 목숨을 걸고 간수와 접촉해 옥에 갇힌 노준의를 만난다. 이런 정성에 노준의가 깊이 감동한다.
4. 전격 '취화루' 작전
노준의의 처형일이 정해지자 양산박의 대응도 빨라 진다. 사실 <수호전>의 진짜 주인공은 오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군사(軍師)의 비중이 크다. 오용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후 양산박 호걸 각자에게 해야 할 임무를 지정한다. 송강을 비롯한 호걸들이 변장해 처형장 주변에서 명령을 기다린다. 근처 취화루에 숨어있던 연청이 군사의 신호에 맞춰 연막탄을 터트리자, 연기를 보고 멀리 동문 밖에 있던 임충이 병력을 이끌고 소란을 피운다. 이 바람에 관군 병력이 분산된다. 노준의 구출작전은 2차대전 특공대 영화와 아주 흡사하다. 연창이 피우는 봉화는 다이너마이트처럼 생겼고, 작동시키는 방법도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5. 악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다
도합 4번의 시도 끝에 노준의는 결국 자유의 몸이 된다. 서둘러 성 밖으로 도망가야 할 터인데 집으로 우선 향한다. 무송(적룡 / 狄龍 / Ti Lung)과 연청이 앞장서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이고와 가부인을 노준의 앞에 대령한다. <수호전>의 세계관에서 주인을 배신한 하인, 지아비를 배신한 부인은 처단해야 마땅하다. 봉(棒)으로 이고를 먼저 때려죽인 노준의는 가 부인에게는 차마 손을 쓰지 못한다. 약한 심성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연청이 먼저 나서 가부인의 목을 자른다.
6. 사형제의 비극
성을 빠져나온 일행은 임충과 만나 양산으로 향한다. 그 길목에서 증두시의 사문공이 양산박 호걸을 기다린다. 사문공은 양산박 도적떼를 소탕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 하고, 양산박의 두령 송강은 그토록 고대하던 조개의 복수를 노린다. 사문공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맞짱 대결에 응한다. 노준의가 사문공을 맡고, 증가오호는 '흑선풍' 이규, 무송, 임충, 석수, 그리고 유일한 여성 호걸인 '일장청' 호삼랑(하리리 / 何莉莉 / Lily Ho Li Li 분)이 각각 상대한다.
영화 전반부, 양산박 병사 한 명을 증가오호 다섯이 희롱하듯 죽였더랬다. 클라이맥스에서 증가오호는 그 죗값을 톡톡이 치른다. 임충의 창이 상대의 몸을 꿰뚫는 장면을 시작으로, 증가오호는 차례대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다. 오만했던 증가오호는 모두 복부를 훼손 당해 죽어가고, 이 순간은 어김없이 슬로모션으로 기록된다.
하나씩 저승길로 가는 제자들을 보며 사문공의 창끝도 무뎌진다. 노준의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사형제 간의 정을 생각해 살려 보낼 생각이다. 이번에도 마음 약한 주인을 대신에 연청이 나선다. 사문공은 연청과 이규의 협공에 결국 복부에 큰 상처를 입는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둔 사문공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더니 제 힘으로 창자를 꺼내 자결한다. 이로써 송강은 조개의 복수를 완성했고, 노준의를 얻었다. 노준의는 목숨과 새 친구를 얻은 대신 부인과 사형제를 저승길로 보냈다. 호쾌한 음악이 흐르며 영화는 끝이 나는데, 노준의에 몰입이 되어서 그런지 영 찝찝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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