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두기봉(杜琪峯 / Johnnie To Kei Fung) 감독은 영화 <탈명금>을 통해 적어도 지금 홍콩에서는 돈이 아닐까 씁쓸히 뇌까린다. 이 영화는 로버트 알트만,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여러 주인공을 따라가는 두기봉 특유의 부조리극으로 감독의 전작 중에선 <P.T.U>와 가장 결이 가깝다. <펄프 픽션>과 비슷한, 에피소드식 구성을 갖고 있는데, 1부에서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은행원 테레사(하운시 / 何韻詩 / Denise Ho Wan-Si)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고, 2부는 유청운(劉青雲 / Sean Lau Ching-Wan)이 연기하는 삼류조폭 빠오의 모험담을 그린다. 형사 정국방(임현제 / 任賢齊 / Richie Ren Xian-Qi)과 연일 치솟는 아파트 가격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 부인 코니(호행아 / 胡杏兒 Myolie Wu Hang-Yee)의 이야기가 중간중간 이어지고, 마지막 후반부에 이들 모두의 운명이 결판난다.
두기봉의 인장이나 다름없는 스타일리시한 총격전, 폭력 묘사가 없는 대신, 주가 지수, 은행원과 고객 사이의 대화만으로 그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만든다. 영화 속 모든 이는 돈을 벌려고 안간힘 쓰는데, 영화의 영어 제목(without Principle)처럼 무규칙 하게 움직이는 돈은 캐릭터들의 운명에 치명적으로 개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물과 공기처럼 생존의 필수요소다. 살아 숨 쉬는 동안,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이 만들어 내는 운명의 롤러코스터에 앉아 그 속도와 낙차를 견딘다. <탈명금>은 배금주의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에 강한 비애(悲哀)의 순간을 담아낸다. 두기봉은 언제나 수준급의 영화를 뽑아낼 줄 아는 특급 감독이다. <탈명금>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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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주거의 빈부격차
홍콩의 허름한 공동 주거 건물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프롤로그는 두기봉이 홍콩, 그리고 좁은 공간을 세계에서 가장 잘 찍는 감독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공동 아파트 내부는 앵글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좁은 공간인데도 깊이감 있는 화면으로 담겨있다. 돈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 노인들이 세를 얻어 사는 이곳에 60대 노인이 같은 세입자를 폭행하고 도주를 했다. 출동한 중안조 형사 정국방이 현장을 둘러보는데, 두기봉의 관심은 사건에 있지 않고 이 공간 그 자체에 있다. 세를 놓기 위해 한 집을 여러 개로 쪼개어 만든 공동 주거지는 홍콩 자본주의 사회의 최하층민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정국방은 부인 코니의 호출을 받고, 부인이 사고 싶어 하는 신축 아파트를 보러 간다. 깔끔한 인테리어, 오션 뷰가 특징인 최신식 아파트는 미로 같은 공동 주거지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인 은행원
1부의 주인공 테레사는 좁은 상자 같은 사무실에 갇혀 고수익 고위험의 펀드를 영업한다. 테레사의 에피소드에선 금융소매업의 속성이 신랄하게 묘사된다. 은행직원들은 친절한 미소를 앞세워 어려운 경제용어에 익숙하지 못한 중장년들의 돈을 노린다. 한 중년여인은 동전을 지폐로 바꾸러 왔다가 수수료가 있다는 직원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내 돈을 바꾸는 데도 돈을 내야 한다고?" 은행은 어떤 의미에선 친절한 미소로 가장한 조폭들일 지도 모른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테레사가 중년의 정 씨 여인(소행선 / 蘇杏璇 / So Hang-Suen)에게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는 장면은 <탈명금>의 심장과도 같다. 정씨 여인은 정기예금 이자율이 너무 낮아, 돈을 더 벌고 싶은 생각에 테레사를 찾아왔다. 정 씨는 본인 돈을 투자하는 데도 은행 방침에 따라 투자 성향을 검사받고, 지루한 상품 가입 절차를 견뎌야 한다. 두기봉 감독은 이 과정을 최대한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 절차의 대부분은 원금손실의 책임이 오롯이 계약 상대방에 있고, 은행은 면책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길어서 더 끔찍한 이 시퀀스는 비좁은 테레사의 상담실이 주무대다. 제 아무리 좁은 공간을 잘 표현하는 두기봉이라 할지라도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온갖 감정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배우 소행선이 이 장면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계약이 성사되기 직전, 테레사가 탕비실에서 정 씨 여인에게 줄 커피를 타는 장면이다. 화면 오른쪽에 테레사가 치우쳐져 있고, 화면 왼쪽에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테레사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두기봉은 이 쇼트 하나로 간단히 표현해 냈다. 노인들이라고 다 재테크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테레사의 단골 고객 중 고리대금업을 하는 종 사장(노해붕 / 盧海鵬 / Lo Hoi-Pang)은 테레사의 에피소드와 뒤에 이어질 빠오의 에피소드를 잇는 인물이다. 테레사가 정씨 여인에 브릭스 펀드를 판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의 국가 부도 위기로 증시가 폭락한다. 정씨 여인은 이 날 하루 만에 원금의 35%를 잃는다. 종 사장은 패닉에 빠져 은행에 몰려든 사람들을 비웃으며 크게 웃는다. 증시가 폭락하면 자기에게 돈을 빌리러 올 사람이 더욱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재에 밝은 종 사장은 잠시 뒤 은행 주차장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테레사는 종 사장이 임시로 맡기고 간 5백만 불 때문에 본격적인 신경쇠약 상태에 빠진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조폭
중년 조폭 빠오가 중심이 된 2부는 <흑사회>의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홍콩 최고의 연기파 배우 유청운이 빠오를 연기하는데, 이 인물은 평소의 두기봉 영화라면 임설이 연기했을 캐릭터다. 뭔가 모자라는데 충성심만은 대단하다. 빠오의 보스가 생일 축하연을 여는데 돈이 별로 없다. 비용 절감을 위해 빠오는 테이블 수를 줄이고, 음식은 모조리 채식으로 준비하는 등의 갖은 수를 낸다. 그 와중에 보스는 생일 축의금을 꼼꼼히 챙기고, 빠오에게는 용돈 한 푼도 챙겨주지 않는다. 조폭 사회가 의리로 굴러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헛소리다.
빠오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경찰에 체포된 의형제 화(장조휘 / 張兆輝 / Eddie Cheung Siu-Fai)의 보석금 마련을 위해 과거의 형제들을 찾아가 읍소해야만 한다. 식당 주인 영꺼(나영창/ 羅永昌 / Law Wing-Cheong)는 아침부터 테이블에 죽치고 있는 앉은 빠오를 견디다 못해 돈 몇 푼을 쥐어주고 보낸다. 폐지 장사를 하는 샘꺼(황일화 / 黃日華 / Felix Wong Yat-Wah)에게서도 기어이 돈을 받아낸다. 힘들게 모은 보석금을 내고 화꺼를 서구 경찰서 유치장에서 꺼내 놨더니, 이번엔 동구 중안조 형사가 다른 건으로 화꺼를 체포해 간다. 화꺼는 빠오에게 다시 한번 보석금을 마련해 달라하니, 화꺼의 부하들 모두 도망가고 빠오만 남게 된다.
83년판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을 연기했던 황일화, 두기봉 감독 밑에서 현장연출을 도맡았던 나영창, 역시 TVB 소속의 베테랑 장조휘, 담병문, 소행선 등은 오랜 세월 두기봉과 인연이 각별하다. 홍콩 대중들에겐 무척 익숙한 이 배우들이 두기봉의 영화에선 기존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출연해 놀랄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홍콩 관객들은 나 같은 해외 관객들에 비해 훨씬 더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1부가 사실상 배우 소행선의 독무대였다면, 2부에서는 강호문(姜皓文 / Philip Keung Hiu-Man)이 제일 빛난다. 강호문이 연기한 용꺼는 불법적인 자산 운용으로 큰돈을 번 인물. 빠오가 보석금 마련을 위해 용꺼를 찾아가는데, 용꺼는 흔쾌히 회사 변호사를 불러 일을 해결해 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빠오를 주식의 세계로 인도한다. 용꺼 밑에서 일하는 전문 펀드 매니저들이 주가 지수의 상승과 하강에 베팅하는 투자 방식을 설명하고, 이를 듣고 있던 빠오는 "바카라와 같네"라 하며 주식 투자의 도박적 속성을 정확히 꿰뚫는다.
그리스 국가부도 사태는 용꺼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주(錢主)의 증권 거래 계정을 몰래 해킹해서 투자를 하고 있던 용꺼는 주가 하락으로 메울 수 없을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된다. 머나먼 그리스의 국가 부도가 용꺼의 인생을 막장으로 내몬다는 게 글로벌 금융시장 하에 사는 현대인들의 아이러니다. 용꺼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리대금업자 종 사장의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빠오는 용꺼가 베푼 호의의 대가로 강도짓에 동참한다.
욕망의 낮과 밤
영화의 후반부는 종 사장이 은행에서 인출해 간 1천만 불의 행방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온갖 아이러니한 사건들이 속출하는데, 그중에서도 전주의 징벌(?)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용꺼의 최후가 백미다. 가슴에 칼이 꽂힌 용꺼는 급히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마지막 역전 한 방을 위해 사설 증권 거래소로 향한다. 고통을 참으며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가는 곳마다 긴급 출동한 소방차와 구급차가 길을 막는다. 살 길이 눈앞에 있는데도 앰뷸런스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핸들을 돌리는 용꺼의 모습에 기가 막힌다.
사실 소방차와 앰뷸런스의 행렬은 영화의 프롤로그, 공동 주거지에서 세입자를 폭행하고 도주한 60대 남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LPG 가스통을 들고 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현장에 있던 정국방 형사는 노인을 제지하려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갇히는데, 노인은 가스 밸브를 열고 라이터를 켜려고 한다. 이 노인은 정국방에게 "어려서는 섬유공장에서 일했어. 섬유가 시들해진 뒤로는 전자부품공장에서 일했지. 그런데 공장이 다 중국으로 넘어가 버렸어. 그동안 집세 내려고 안 해 본 일이 없어." 중얼대다 가스로 인해 정신을 잃는다. 노인을 연기한 라강(羅強 / Law Keung)은 홍콩의 원로 스턴트맨이다. <흑사회2>에서 삼합회 원로로 출연한 뒤 두기봉의 <문작>, <피의 복수>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아마도 라강의 영화 커리어상 클로즈업을 받으며 긴 대사를 한 것은 <탈명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영화 내내 답답한 신세였던 테레사, 빠오, 그리고 형사 정국방과 부인 코니는 마지막에 거액의 돈을 손에 쥔다. 그래서 해피엔딩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걸린다. 빠오는 시가 상점에 들어가 최고급 라벨의 상품을 구매한 뒤, 거리를 걸으며 맛나게 시가를 피운다. 반대편에선 돈가방을 쥔 테레사가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걸어온다. 시가와 아이스크림은 모두 기호식품이다. 기호는 잉여에서 출발하고, 한번 돈 맛을 보면 더욱더 돈에 속박된다. 이번에는 운 좋게 판돈을 휩쓸었으나 다음번엔 그들이 종 사장이나 용꺼가 될 게 뻔하다.
작품 정보
<탈명금>은 두기봉이 이끄는 밀키웨이 이미지(銀河映像 / Milkyway Image)와 장징(莊澄 / John Chong Ching)의 미디아 아시아(寰亞電影 / Media Asia)가 공동 제작했다. 개봉은 2011년 10월 20일! 두기봉이 감독과 제작을 겸하고, 각본은 구건아(歐健兒 / Au Kin-Yee), 엽천성(葉天成 / Yim Tin-Sing)을 중심으로 은하창작조(銀河創作組) 작가들이 공동 집필했다. 두기봉의 오른팔로 활동했던 나영창이 독립한 관계로 맥계광(麥啟光 / Albert Mak Kai-Kwong)이 현장 연출을 담당했다. 촬영 정조강(鄭兆強 / Cheng Siu-Keung), 미술 엽숙화(葉淑華 / Sukie Yip Suk-Wah), 편집 데이비드 리차드슨(David Richardson) 등은 두기봉의 오랜 파트너들이다. <탈명금>은 2011년 제6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이며, 제31회 홍콩금상장에서 작품상을 포함 8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어, 이 중 2개의 트로피(남여조연상)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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