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영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책 <영화의 맨살> 마지막 4부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2001년~2011년 사이에 쓴 글을 모아 두었다. 21세기에도 하스미 선생은 장 뤽 고다르와 존 포드에 대해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1) 작가주의에 거스르면서 팀 버튼을 옹호하는 것의 곤란 - <혹성탈출> (2001년)
2001년, 폭스사는 큰 기대를 품고 팀 버튼에게 <혹성탈출>의 리메이크를 의뢰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고, 2011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이르러서야 프랜차이즈로서의 생명연장을 꾀할 수 있게 된다. 당시 미국 평단은 팀 버튼 판 <혹성탈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메타크리틱 점수는 50점, 로저 에버트는 별 두개 반을 줬다)을 취했다. 하지만 하스미 시게히코는 '<진주만>은 말할 것도 없고 스필버그의 <A.I>보다 훨씬 재미있는 영화'라고 옹호한다. 그 이유로 영화 속 원로원 의원 원숭이의 집에 상류 계층 원숭이들이 모여 격식있게 만찬을 즐기는 시퀀스를 꼽는데... 상류층 유인원의 만찬을 우스꽝스럽지 않게 연출할 수 있는가? 조금만 삐끗해도 B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이 시퀀스에 가득하다.
하스미 선생은 팀 버튼의 예민한 감수성이 이 영화를 볼만한 것으로, 오리지널보다 훨씬 우월한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예컨데 오리지널의 찰톤 헤스턴은 영화 내내 우람한 상반신을 드러냈다. 털북숭이 원숭이는 인간보다 미개하다는 제작진의 무의식적 반영이다. 반면 리메이크판의 마크 월버그는 우주복 아래 입고 있는 내의를 결코 벗지 않는다. 영화 속 유인원의 자부심은 몸을 뒤덮은, 풍성한 털에 있고, 털이 빈약한 인간은 미개하다. 팀 버튼은 이를 절대 잊지 않았다.
2) 고다르의 '고독' (2002년)
1998년, 하스미 시게히코는 장 뤽 고다르의 작업실에 가서, 고다르와 함께 <영화의 역사(들)>을 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2002년에 <고다르의 '고독'>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하스미 선생도 이 영화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했다는 뜻이다. 나의 교양수준으로는 도저히 무리다. 그러나 실패한 해독 과정 중에 영화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니...하스미 선생은 마치 절친이나 되는 것처럼 장 뤽 고다르의 3가지 고약한 결함을 지적하며 글을 시작한다. 첫째, 그는 항상 지각한다. 때를 맞추지 못한다. 둘째, 그는 기다리지 못한다. '실제로 찾고 있는 책이 책방의 선반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우연히 거기에 있던 다른 책을 구입하고 만족해 버린다.' 셋째, 그는 공짜로 주는 법이 없다. 당연히 공짜로 받는 법도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챕터는 앞에서 지적한 세 가지가 고다르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 아닌 '영화작가로서 받아들인 영화의 역사적 현실에서 유래하는 필연적 몸짓'이라 정정한다. 즉, 영화 역시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항상 지각한다. 영화는 항상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움직인다. 영화는 공짜로 주는 법이 없다. 난해한 화두가 따로 없다. 지금부터는 나의 해석이다.
첫번째, 영화가 지각한다는 것은 영화와 시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영화가 지금을 찍을 수 없다. 찍는다 해도 보여지는 순간 이미 과거의 일이 된다. 그래서 영화는 항상 늦게 올 수 밖에 없다. 둘째, 영화는 늦게 도착했으므로 빨리 쫓아가기 바쁘다. 그 바람에 스스로를 돌아 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제 시대에 저주받고 한참 후에서야 그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작가는 이 때문에 생긴다. 세 번째, 영화는 공짜로 주는 법이 없다. 특정 영화가 왜 좋은가 설명할 때 사람들은 배우의 연기가 좋아서, 화면이 그림 같아서, 이야기가 훌륭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한다. 영화를 연극, 사진, 회화, 음악, 문학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의 합인가? 영화를 영화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종합예술이라는 단어로 영화를 퉁쳐 부르는 사이, 영화의 본질은 무시된다. 영화는 무엇인가? 가진 게 없으니 줄 것이 없다.
하스미 선생은 고다르를 '외계인 JLG'라 칭하며, <영화의 역사(들)> 속 주요 담론을 따라간다. 지각이란 측면에서 존 포드와 장 뤽 고다르를 비교한 대목이 재미있다. 존 포드는 프로듀서에게 제작 일정과 관련하여 독촉을 받자, 갖고 있던 시나리오 몇 페이지를 현장에서 찢어 버렸다. 만들기로 했으나 만들지 않음으로서 제 시간에 완성을 한 것이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는 쫓겨서 지각을 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듯 지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고다르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감독들은 오만가지 이유로 완성기한에 영화를 맞추지 못하는 사태를 겪는다. '성급함' 파트의 히치콕 관련 대목은 감동적이기다. '성급한 고다르는 히치콕적인 서스펜스 같은 것에 조금도 흥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무엇이든 '기다린다'는 자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는 그것이 히치콕에 의한 것이라도 '카타르시스'의 도입에 필수적인 허공에 뜬 시간에 자신을 동조시키는 것이 아주 견딜수 없는 것이다.(중략)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빠름을 다투는 체험인 것이다. 그 체험에서 고다르는 끊임없이 히치콕보다 한 걸음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 "풍차"와 "하얀 우유"나 "옥수수 밭의 버스"나 "늘어선 병" (<영화의 역사(들)>에서 고다르가 언급한)의 이미지는 숨을 헐떡이며 앞을 가고 있는 고다르에 히치콕적인 허구의 지속이 기적처럼 따라붙은 순간에 다름아니다.'
이 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지점은 끝부분, <영화의 역사(들)> 첫 번째 파트에 "만약 조지 스티븐슨가 사상 처음으로 16mm 컬러 필름을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뤼크에서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결코 햇빛이 비치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두고 이것이 영화에서 이례적일만큼 교육적인 문장으로 씌여진 이유가 다름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하스미 선생의 해석이다. 더욱이 이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한 고다르의 복잡한 심적 굴절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 복잡함이란 애증의 의미일까?
※ 13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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