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세 명의 여성 슈퍼히어로가 나온다. 리더 격인 여비협(女飛俠)은 매염방(梅艷芳 / Anita Mui Yim Fong)이 연기한다. 여비협은 날카로운 표창과 활처럼 휘어지는 연검을 주 무기로 사용한다. 건물 옥상과 옥상 사이를 손쉽게 뛰어넘고, 거미처럼 전깃줄을 타고 다닐 수 있다.
서구 관객들은 여비협의 이런 능력에 고개를 갸웃할 지 모르겠다. 스파이더맨처럼 실험실 거미에 물린 것도 아니고, 슈퍼맨처럼 외계인도 아닌데, 여비형의 초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지만 무협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동방삼협>의 설정을 숨 쉬듯 이해할 수 있다. 여비협은 경공과 비도술, 검술에 능한 무림 고수다.
홍콩 영화에서 여성 무림고수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섭은랑' 등 여협을 주인공으로 한 고전 소설, 희곡 등이 넘쳐난다. 쇼 브라더스 전성기를 열었던 호금전(胡金銓 / King Hu)의 <대취협(大醉俠 / Come Drink With Me>(1966년) 또한 여협이 주인공이다.
1990년대 초반, 서극이 주도했던 SFX 신무협 역시 이연걸(李連杰 / Jet Li)과 더불어 여성 스타 임청하(林青霞 / Brigitte Lin)의 존재를 빼고 논할 수 없다. 이 영화 <동방삼협>은 무협 서사 속 여협을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장르와 접목하려는 시도다.
1. 트로이카
3인의 여성 히어로는 당대 최고의 스타 매염방(梅艷芳 / Anita Mui Yim Fong), 양자경(楊紫瓊 / Michelle Yeoh), 장만옥(張曼玉 / Maggie Cheung Man Yuk)이 맡았다.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경쟁하듯 여성미를 과시하며 액션과 로맨스,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준다. 이 3인이 한 작품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동방삼협>이 최초였다.
영화에는 이들의 화양연화가 담겨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동방삼협>이 홍콩 엔터테인먼트 사(史)에 있어 역사적인 이벤트라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주연배우들은 당시에도 스타였지만, 지금은 그 이상,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격상됐다.
장만옥은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2004년)을 받았고, 양자경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2023년) 수상자가 됐다. 매염방은 슬프게도 2003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지금도 '홍콩의 딸'로 불리며 홍콩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2. 매염방
<동방삼협>에서도 매염방은 경찰의 정숙한 아내였다가 밤이 되면 악당과 싸우는 여비협을 맡았다. 영화에서 양자경이 멜로를, 장만옥이 통통 튀는 양념 같은 역할을 맡았다면, 매염방은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한편 아이들을 지키거나, 누군가를 다독이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남겼다.
홍콩 감독들(그리고 대중들)은 평생 싱글로 지낸, 그리고 출산 경험이 없는 매염방에게 의지가 되는 엄마, 누나 같은 이미지를 즐겨 투영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8~90년대 홍콩 연예계에서 매염방은 범상치 않은 리더쉽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장국영, 유덕화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몇 안되는 친구였고, 성룡과 증지위와도 형제처럼 교분을 나눈 사이였다. 후배들(그룹 초맹과 하운시)을 지원할 뿐 아니라 천안문 시위를 주도한 민주화 인사들의 해외 망명을 남몰래 도왔다. 그녀는 실제로도 여협이었다.
3. 양자경
이혼 후 <폴리스스토리 3>로 컴백한 양자경은 결혼 전 위상을 단번에 되찾았다. 국제적 인지도를 얻게 됐고, 성룡과 맞짱 뜬 유일무이한 여성 액션 스타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했다. 양자경은 차기작 <동방삼협>에서 액션 말고도 보여줄 것이 많은 배우임을 입증한다. 특히 몸매가 다 드러나는 슈퍼 히어로 유니폼, 가슴선이 드러나는 로우컷 등 외양에서부터 성숙한 여성미를 과시했다.
양자경은 매염방과 함께 선두에서 영화를 이끈다. 초반은 매염방 위주로 진행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실질적 주인공은 양자경임을 깨달을 수 있다. 양자경이 맡은 '진삼'이란 캐릭터는 선과 악 사이에서 고뇌한다. 악당 진공공의 행동대장으로서 신생아를 납치하는 흉악범인 동시에 어떤 발명품을 빼앗기 위해 천재 과학자에게 접근하는 스파이 노릇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삼은 진심으로 과학자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책임을 지려한다.
4. 장만옥
장만옥은 가장 제멋대로 날뛰는 캐릭터 '진칠'을 맡았다. 세 주인공 중 멜로 라인을 부여받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장만옥은 펑크스타일의 바운티 헌터로 나온다. 그녀에겐 돈이 최고지만, 다른 여협들과 손 잡고 양심의 소리를 따른다.
두기봉 감독은 장만옥과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다. <적각비협>에선 강인한 성격의 과부, <심사관 2>에선 창녀, <동방삼협>에선 천방지축 여전사 역할을 맡겼다. 90년대 중반까지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던 장만옥은 <첨밀밀>과 <화양연화>를 통해 세기말 홍콩의 멜로 여왕으로 등극한다.
5. 혼종, 무질서
<동방삼협>을 보면 영화 속 시간대가 현대인지 과거인지 애매모호하다. 1930년대 상해처럼 보였다가 스판덱스 차림의 히어로를 보면 미래 같기도 하다. 장만옥은 펑크 룩을 입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몬다. 악당은 왕조 때부터 살아남은 환관이다.
옛 것과 새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병치한 <동방삼협>의 포스트모던한 비주얼 스타일은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듯 하다.
90년대 초반 홍콩영화는 전성기를 찍고 막 쇠퇴기로 접어든 시점이었다. 반환을 앞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불안감이 원인이었까? 자기 파괴적이면서 실험적인 영화들이 메인스트림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졌다. <동방삼협>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정신분열증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럽다. 폭력의 묘사가 그렇다. 어린이와 동물은 죽이지 않는다는 상업영화의 암묵적 규칙은 가볍게 깨부순다. 이런 카오스가 <동방삼협>의 장점이다. 무협 서사와 누아르, 굉장히 펑크적이고 무국적인 이미지, 선정적일 만큼 강도 높은 폭력묘사, 멜로의 컨벤션이 한 영화에 욱여넣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임영동 감독 / 주윤발 주연의 <협도고비>에도 <동방삼협>과 아주 유사한 특징이 발견되는데, 두 영화 모두 유럽 등 외국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혼란스러운 영화의 연출을 두기봉(杜琪峰 / Johnnie To Kei-Fung) 감독이 맡았다는 게 지금 와서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홍콩 최후의 거장' 두기봉은 이 시기 쇼 브라더스와 협업하며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미 시네마시티에서 80년대 말 <개심귀 2>, <팔성보희>, <우견아랑> 같은 히트작을 만들었던 두기봉은 90년대 들어 굉장히 양식적이고, 표현주의 스타일의 영화에 경도된 듯 보였다. <동방삼협>을 포함, <심사관>, <적각비협>, <지존무상 2> 등은 리얼한 배경을 버리고, 판타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살인귀 '진구'역으로 황추생(黃秋生 / Anthony Wong Chau Sang)이 나온다. 아무리 배우라도 웃통 까고, 머리 밀고, 기괴한 분장을 감수해 가며 눈요기거리에 불과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황추생은 이때 고생을 한 덕분에 훗날 두기봉의 <미션>, <익사일>, <피의 복수>에서 세상 쿨한 히어로 역을 맡게 된다.
6. 되면 한다!
영화의 액션은 <천녀유혼>, <동방불패>의 정소동(程小東 / Tony Ching Siu Tung)이 맡았다. 슈퍼히어로 장르를 표방하지만 모호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정소동이 디자인한 액션은 당시 유행했던 SFX 무협의 동작과 다르지 않다. 와이어 액션을 기반으로 한 육탄 대결이 대부분이다. 드럼통에 다이너마이트를 붙인 뒤 이를 폭발시켜 그 추진력을 통해 하늘을 나는 설정은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기차가 벽을 뚫고 역 내로 돌진하는 장면과 <터미네이터>1편의 라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클라이맥스는 할리우드를 닮고자 하는 욕망과 한참 떨어지는 기술력을 동시에 노출한다. 이걸 제작진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설프게라도 '되면 한다'는 의지가 느껴져 마냥 비웃기도, 박수치 기도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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