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걸(李連杰 / Jet Li)은 <리썰 웨폰 4>의 메인 빌런으로 할리우드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며 '악당' 이연걸이 주인공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의 손에 의해 응징당하는 모습에서 통쾌함은커녕 부당불편한 감정이 들었는데, 아마도 이연걸이 내추럴 본 '황비홍'이자 아시아에서 성룡 다음 가는 액션영웅이었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인지 부조화였던 듯 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 이연걸은 할리우드에서의 첫 주연작 <로미오 머스트 다이>를 들고 당당히 영웅으로의 컴백을 알린다.
1. 왜 로미오인가?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중국계 갱단과 흑인 조직 간의 암투를 그린다. 이연걸은 삼합회 보스의 아들로 나오는데, 상대 조직 보스의 딸 알리야(Aaliyah)와 협력해 동생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제목으로 볼 때 로미오는 이연걸, 줄리엣은 알리야가 되어야 마땅한데, 이 영화는 원수의 자식들이 금지된 사랑을 나눈다는 절절한 러브 스토리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친구 사이, 혹은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파트너로 차라리 남녀 버디물에 가깝다. 이럴 거면 '로미오'는 왜 소환했나 싶다. 촬영 당시 이연걸은 30대 후반이고, 알리야는 갓 스물이었다. 두 배우는 나이 차이가 크고, 무엇보다 피부색이 다르다. 이연걸은 할리우드 첫 주연작이었고, 알리야는 영화 데뷔작이었으니 인종과 나이를 넘어선 러브 라인을 밀고 가기에 무리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2. 살부(殺父)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비슷한 이야기지만, 러브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피해 가는 바람에 구멍이 생겼다. 물론 이 영화는 가벼운 무술 액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야기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 속 테마들이 헤비 한 편이다. 금지된 사랑 외에 '살부(殺父)'의 플롯도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
주인공 한은 과거 홍콩 경찰이었으나 아버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힌다. 아버지는 싫지만, 동생 포가 미국에 건너가서 평안한 삶을 살기 바랐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 것이었다. 포가 죽자 한은 아버지를 상대로 그 책임을 묻기 위해 탈옥을 감행, 미국으로 향한다. 아버지 추는 냉혹한 사람으로 이익을 위해서라면 가족이라도 단칼에 벨 수 있는 악인이다. 알리야 역시 아버지와 갈등 관계에 있다. 아이삭이 범죄 조직의 수괴인 탓에 오빠 콜린마저 타락의 길을 걷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살해까지 당하자 알리야는 동병상련 격인 한과 손을 잡게 된다.
20여 년 전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류승완 감독의 <짝패>처럼 부동산 재개발과 관련된 음모를 다루고 있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부동산이 문제다. <로미오 머스트 다이>의 악당들은 항만지역의 부동산을 싸게 사들이기 위해 오랜 동료와 이웃을 협박하고 살해한다. <짝패>의 악당 이범수가 하던 짓과 근본적으로 똑같다. 만약 감독 안제이 바르코비악(Andrzej Bartkowiak)이 - 시드니 루멧과 파트너십 관계에 있던 촬영감독 출신으로 <로미오 머스트 다이>가 감독 데뷔작 - 좀 더 야심 있는 연출자였다면 결과물이 사뭇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3. 홍콩 신드롬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90년대 초반부터 거세게 불었던 홍콩 신드롬의 결과물 중 하나다. 오우삼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을 시작으로, 성룡의 <홍번구>가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홍콩 스타들의 할리우드행이 러시를 이루었다. 성룡은 <러시 아워>로, 주윤발은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로 본격적인 할리우드 진출작을 내놓았다.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영화 모두 성룡과 주윤발의 기존 작품을 할리우드 입맛에 맞도록 조정해서 다시 만든, 일종의 번안곡 같은 영화였다.
스튜디오는 성룡과 주윤발이 못 미더워 각각 흑인 코미디언과 백인 여배우를 파트너로 붙였다. 백인과의 접점을 최소하화려고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스토리를 만들었다. 메인 빌런은 중국인이며, 러브 라인은 변죽만 울리거나 가능성의 싹을 자른다. <로미오 머스트 다이> 역시 두 선배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 이 영화 역시 러브라인이 없고, 차이나타운이 주 무대다. 이연걸은 백인과 싸우거나 백인과 친구가 되지 않는다. 그의 소통 상태는 주로 흑인이고, 최종 악당은 중국인 아버지와 그의 부하들이다. 오프닝 크레디트에 홍콩식 표기를 병기하여 아시아를 존중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취하지만 자존심이 상한다.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조엘 실버(Joel Silver)가 수장으로 있는 실버 픽쳐스(Silver Pictures)에서 제작했다. 조엘 실버는 <다이 하드>, <리썰 웨폰>,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든 장본인으로 80년대부터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다. 그는 90년대 후반, 정체기에 접어든 액션 활극의 새로운 돌파구를 홍콩 액션에서 찾았다. <리썰 웨폰 4>의 악당으로 이연걸을 캐스팅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조엘 실버는 대작 <매트릭스>에서 원화평 감독을 초빙해, 키아누 리브스 등 할리우드 배우들로 하여금 직접 홍콩식 액션을 하게 했지만, 정작 진짜배기 홍콩 스타 이연걸에게는 장 끌로드 반담, 스티븐 시걸의 주종목이었던 중예산급 <로미오 머스트 다이>의 주연을 맡겼고, 소기의 성과(제작비 25백만불 - 추정 수입 91백만불)를 거뒀다.
4. 액션의 설득력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서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포인트는 당연히 이연걸의 액션이다. 전반적인 액션은 할리우드의 베테랑 스턴트 코디네이터 콘래드 E. 팔미사노(Conrad E. Palmisano)가 진두지휘했지만, 무술 액션만큼은 이연걸과 계속 호홉을 맞췄던 홍콩의 특급 무술감독 원규(元奎 / Corey Yuen Kwai)에게 전담토록 했다. 원규는 홍콩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다소 왜소한 체구의 이연걸이 덩치 큰 흑인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임을 설득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풋볼 게임 시퀀스는 아주 전략적이다. 우연히 흑인들과 풋볼을 하게 된 이연걸은 덩치들의 무지막지한 태클에 너덜너덜해 진다. 두 번의 낭패 이후 이연걸은 재빠른 몸놀림과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하는 방식(태극권 비슷한)으로 수비수 모두를 떼어낸 다음 터치 다운에 성공한다.
영화에서 이연걸은 서양인을 상대로 정면 대결 하지 않는다. 민첩성을 발휘해 회피하거나, 무기를 손에 든다. 이연걸이 알리야의 집에 갔다가 보디가드들과 맞닦트리는 장면에선 건물 외벽 계단과 울타리를 활용, 성룡 스타일의 지형지물 액션을 선보이고, 후반부에 갱들과 일 대 다 대결을 펼칠 때는 소방 호스를 중국 전통 무기 대신 휘두르게 함으로써 설득력을 더한다. 특히 후자의 장면에선 이연걸 무술의 멋스러움이 최고조로 발현되는데, 엘리트 무술인 이연걸의 진가는 무기를 들었을 때 나온다.
맨손 결투는 중국계 러셀 웡(王盛德 / Russell Wong)을 상대로 한 클라이맥스 시퀀스 뿐인다. 이연걸과 러셀 웡은 거친 타격전을 펼치는데, 러셀 웡이 이연걸의 화상 입은 손을 집중 공략하고 급기야 살껍질을 뜯어내는 등 그 싸움의 양상이 아주 흉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룡과 척 노리스(<맹룡과강>) 혹은 성룡 vs 베네 우르퀴데즈(Benny Urquidez)(<쾌찬차>)와 같은 전설적인 일 대 일 장면으로 남는 데 실패한다. 이연걸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파괴적인 결투 안무가 가능했을텐데, 제작진은 자꾸 잔기술로 이연걸의 동작을 쓸데없이 꾸미려 한다. 예컨데 와이어를 이용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동작을 집어 넣거나, 타격 시 <CSI> 스타일의 엑스레이 영상 - CG로 만든 - 으로 상대의 몸이 받는 충격을 묘사한다.
5. 이연걸이라는 배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액션 스타들은 배우로서 과소평가를 받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커리어 내내 사실 상 하나의 캐릭터만을 강요받는다는 점이 가장 크다. 사람들은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영화를 보면서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고, 스탤론의 액션 영화에선 '람보'를 떠올린다. 브루스 윌리스의 영화를 보면 '존 맥클레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이연걸은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다. 순진한 소년 (<소림사>, <방세옥> 시리즈), 유교 영웅(<황비홍>시리즈), 과묵한 순정파(<이연걸의 보디가드>), 악당(<리썰 웨폰4>, <명장>, <미이라3>), 냉혹한 전사(<키스 오브 드래곤>, <이연걸의 영웅>), 심지어 정신 연령이 낮은 아이(<더 독>)까지 연기했다. 유달리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한 것은 '배우'로서의 욕심이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로미오 머스트 다이>에서서도 액션 보다 이연걸의 연기에 더 흥미가 갔다. 이연걸은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아들의 비애를 설득력있게 표현하고, 알리야와의 장면에선 귀여운 소년미를 앞세운 멜로 호홉도 보여준다. 교도소 탈출 장면이나 미국에 도착한 초반부의 냉혹한 표정은 낯설지만 잘 어울린다. 모든 출연작을 통틀어 이연걸의 가장 뛰어난 연기는 진가신 감독의 <명장>에서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이연걸은 선과 악을 넘나드는 입체적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변신이 아님을 <로미오 머스트 다이>가 확인시켜 준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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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1) 오클랜드의 망나니캘리포니아 주 서부 연안의 대표적 항구도시 오클랜드! 항만 지역의 각종 이권을 두고, 흑인 갱과 중국계 마피아가 오랜 시간 갈등 중이다. 삼합회 보스 추 싱(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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