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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두번 봐도 재밌는 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譬刀 / One Armed Swordsman) 1967년 - 피 끓는 청춘

by homeostasis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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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 핫 트렌드

홍콩에서 1967년 7월 26일 개봉한 <독비도>는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판도를 뒤바꾸었다. 극장 수입 1백만 홍콩달러를 돌파한 최초의 로컬영화이기도 한 <독비도>는 쇼 브라더스 배급망을 타고 화교 네트워크가 자리 잡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각광받았다. 대만과 한국 극장가에도 신드롬을 일으켰다. '홍콩영화 = 무술영화'라는 공식이 <독비도>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연배우 왕우(王羽 / Jimmy Wang Yu)는 홍콩 영화가 보유하게 된, 최초의 범아시아적 액션스타가 되었다. 적룡, 강대위, 이소룡, 성룡, 홍금보, 이연걸, 견자단으로 이어지는 액션 스타 계보의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몇 년 뒤 불게 되는이소룡(李小龍 / Bruce Lee) 열풍 또한 <독비도>로 대표되는 신무협 장르 때문에 가능했다. 이소룡은 그 존재 자체가 신무협의 안티 테제 였다. <독비도>의 흥행에 고무된 쇼 브라더스는 북경어 신무협 영화를 자사의 주력 상품으로 내세운다. 코미디, 뮤지컬 위주의 광둥어 영화는 신무협의 부상으로 침체기에 접어든다. 쇼 브라더스 전속으로 다섯 번째 영화 만에 대박을 친 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예광(倪匡)과 더불어 1970년대 중반까지 수십 편의 남성 영웅 + 유혈 낭자 액션을 반복하다 장르의 몰락을 자초한다.

2. 외팔이

영화의 첫 장면, 금도문(金刀門)의 장문, 제여봉(전풍 - 田豊 / Tien Feng)은 적들의 암습을 받는다. 미혼약에 중독된 제여봉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주인 제여봉을 구하기 위해 하인 방성(곡봉 - 谷峰 / Ku Feng)이 나선다. 단신으로 악당들과 싸우던 방성은 좌우 옆구리에 칼 두 자루가 꽂힌 상태에서 끝끝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주인을 지켜낸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제여봉은 방성의 아들 방강을 불러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 죽어가던 방성은 감격에 겨워 안광을 뿜어내더니 사부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다.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방성은 스스로 복부에 꽂힌 칼을 뽑고 눈을 감는다. 이때 방성을 연기한 곡봉의 표정과 눈빛은 한국 사람들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담고 있다. 자신은 개고생을 해도 자식들만큼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길 간절히 바랐던 부모세대의 욕망이다. 이 순간, 옛날 영화 <독비도>는 6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동세대 관객들에게도 'Something Special'한 울림을 준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 방성의 최후

성인이 된 방강(왕우)은 탁월한 재능에 실력까지 갖춰 사부 제여봉의 총애를 받는다. 심지어 차기 장문인감으로 생각할 정도다. 그러나 사부의 생각과 달리 동문들은 방강을 미워하고 질시한다. 아버지의 유품 - 반토막 난 부러진 칼이 상징하듯 방강이 미천한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명문가 자제인 동문들은 방강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형이다. 그래서 방강은 항상 울분에 차 있다. 한편 사부의 딸 제패(반영자 - 潘迎紫 / Violet Pan Ying Zi)는 영웅적인 기상을 지닌 방강을 남몰래 사랑한다. 하지만 장문인의 고명딸이 하인 출신 방강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 자체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 제패의 이율배반적 심리는 동문 사형들과 함께 방강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방향으로 표출된다.

아버지의 유품인 부러진 칼

동문들과의 갈등이 증폭되던 어느 날, 방강은 자신의 존재가 금도문에 큰 화가 될 것을 염려, 제 발로 떠나자 결심한다. 씁쓸한 마음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숲길을 걷는 방강. 제패와 사형들은 끝까지 방강을 괴롭히려 앞을 막는다. 이들이 한꺼번에 덤벼도 무력으로 방강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우습게 봤던 사부의 딸 제패의 갑작스런 칼질에 방강의 오른 팔이 잘려 하얀 눈 위로 툭 떨어진다. 방강은 오른팔이 사라진 걸 믿지 못하다가 점점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제패는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방강을 귀신 보듯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독비도>의 이 장면은 정말이지 평생 잊기 힘든 강렬한 이미지로 영혼에 각인된다.

<독비도>는 한국에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한국의 배급업자는 '외팔이' 앞에 '의리의 사나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아마도 '외팔이'라는 단어가 주인공 방강(왕우 - 王羽 / Jimmy Wang Yu)의 영웅적 면모를 담기에 부족하다 여긴 듯하다. '외팔이'는 속된 말로 '병신'의 범주에 속한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방강과 같은 '병신' 남자들이 많았다. 2차 대전, 중국의 국공 내전, 한국전쟁, 월남전을 거치며 불구 남자들이 양산됐다. 일상의 영역에서도 공장, 탄광, 건설 현장 등의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신체의 일부를 잃고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 값이 물건 값보다 못한 시절이었다. 장애를 갖게 되면 노동시장에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당대의 대중은 영화 속 방강의 처지에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를 좀 더 살펴보고 싶은 분들에게 키노 기자 출신의 영화학자 이영재가 쓴  <아시아적 신체 : 냉전 한국·홍콩 ·일본의 트랜스 / 내셔널 액션영화>를 추천한다.

3. 이유 있는 반항

얼핏 볼 때 <독비도>는 익숙한 무협 서사의 답습처럼 보인다. 뛰어난 실력에도 신분 등 타고 난 조건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했던 방강은 설상가상, 팔까지 잃고 절망의 늪에 빠진다. 이런 방강을 구원하는 이는 소박하고 착한 심성의 여인 소만(초교 - 焦姣 / Lisa Chiao Chiao)이다. 소만은 방강의 팔을 자른 제패와 모든 면에서 비교된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을 했다. 제패는 제 멋대로인 성격의 부잣집 외동딸 캐릭터다. 동시에 화려한 외모를 뽐낸다. 반면 소만은 다소곳하고, 순종적이다. 제패와 마찬가지로 소만의 캐릭터는 수수한 외모로 강조한다. 방강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소만에게 얻은 무공 비급(소만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하다)이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 방강이 다시 무공을 되찾자, 소만은 버림 받을 거라 예감하며 슬퍼한다. 멜로 드라마의 고전적 갈등 구조다. 결국 방강이 '착한 여자' 소만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안전한 결말이다.

방강과 제패의 만남을 몰래 엿듣고 오해하는 소만

각본가 예광은 김용(金庸)이 1959년 발표한 <신조협려>에서 양과가 사부 곽정의 딸 곽부에게 팔을 잃는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독비도>의 플롯을 짰다. <신조협려>가 수많은 인연과 엇갈리는 운명을 그린 대하소설이라면 <독비도>는 억울하게 팔을 잃은 남자의 복수극에 집중한다. 겉보기에 방강은 사부 제여봉과 금도문을 지키기 위해 악당 장비신마와 맞서 싸우는 의리의 사나이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뜯어보면 사정이 다르다.

장비신마는 금도문을 절멸시키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일보직전까지 간다. 제여봉은 제자들을 모두 잃고, 식솔만은 살려달라 장비신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바로 이때, 제 발로 금도문을 박차고 나간 방강이 나타난다. 방강은 금도문의 상징인 금도(金刀)를 미끼로 쓰고, 아버지의 유품인 반토막난 칼로 장비신마를 물리친다. 그리고 은혜를 다 했다며 제여봉과 제패를 뿌리치고 제 갈길을 간다. 방강은 제여봉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박살 냈다. 영화의 끝부분, 제여봉은 낭패감에 스스로 자기 칼을 부러트린다.

이때 <독비도>는 무협영화, 사극이라는 외피에도 불구하고 반항적인 영화로 탈바꿈한다. 가진 것 없는 젊은이가 온갖 불운을 극복하고, 기존 질서의 판을 뒤흔드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왕우라는 배우의 존재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점잖은 영웅의 모습을 연기할 때 왕우는 보통의 배우일 뿐이다. 반면 거칠 것 없는, 오만방자한 남자를 연기할 때 왕우는 스크린을 완전히 집어삼킨다. 방강이 눈물을 삼키고 금도문을 떠날 때, 사형과 제패가 그 앞을 막아서는 장면이 있다. 배신자라 응징하겠다는 이들 앞에 방강은 해 볼 테면 해보라 칼을 빼드는데, 이 장면에서 왕우는 이게 연기인가, 실제 모습인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실감이 난다. 얼마나 잘난 척을 해대는지, 제패가 방강의 팔을 자른 게 납득 갈 정도다.

방강은 팔이 잘린 직후 분노에 휩싸인다

4. 칼인가, 총인가

쇼 브라더스의 일진, 유가량(劉家良 / Lau Kar Leung)과 당가(唐佳 / Tong Kai)가 <독비도>의 액션을 만들었다. <독비도>는 홍콩 액션 영화의 출발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평소 병장기에 관심이 많은 유가량은 제여봉의 금도, 이를 상대하기 위한 비밀병기 금도쇄(金刀鎖), 채찍, 창 등 다양한 무기를 등장시켜 액션 장면에 아기자기한 재미를 더했다. 하지만 정교한 합, 빠른 페이스의 타격, 슈퍼 스턴트처럼 우리가 홍콩 액션 하면 떠올리는 요소들은 아직 도래하기 전이다. 배우들의 과장된 동작은 느리기만 하다. 이를 커버하려고 핸드 헬드 쇼트를 사용한다. 대신 <독비도>의 액션은 마카로니 웨스턴의 총싸움을 닮아 있다. 방강의 결정타는 언제나 전광석화처럼 적의 몸에 꽂힌다. 재빠른 커팅 때문에 관객은 공격이 어떤 식으로 들어갔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대신 쓰러지는 악당들을 보며 공격을 가늠할 뿐이다. 신무협의 액션은 서부 영화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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