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ge>편은 <스타트랙> 최초의 에피소드지만 전파를 타지 못한 미방영 파일럿이다. NBC 방송국은 페이스가 느리고 내용이 진지 - 당시 방송국은 SF를 소년소녀 취향의 어드벤처물로 인식했다 - 하다는 이유로 다른 파일럿 제작을 - TV업계에선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 지시했다. 제작진은 출연진을 완전 교체 하는 강수를 두며 두 번째 파일럿( <Where No Man has Gone Before>)를 완성한다.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스타트랙>이 NBC 정규 편성을 받게 된다. 그러니 <The Cage>편은 <스타트랙 TOS>의 베타 버전이다. 여기에는 익숙한 이름들, 캡틴 커크, 의사 맥코이, 술루가 등장하지 않는다. '뾰족 귀' 스팍만이 얼굴을 내민다.
이 에피소드는 추가 촬영을 거쳐 시즌1의 <The Menagerie> 2부작으로 재편집된다. 이 과정에서 오리지널 필름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남아 있는 필름은 쇼의 크리에이터, 진 로든베리(Gene Roddenberry)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16mm 흑백 프린트뿐이었다. 1980년대 초반, 파라마운트 아카이브에서 사운드 없는 원본 필름이 발견된다. 덕분에 우리는 선명한 화질의 <The Cage>편을 볼 수 있게 됐다.
1. 파이크 함장과 넘버 원
<The Cage> 편은 스타트랙 타임 라인에서 제임스 커크가 활약하던 시점에서 11년 전의 일이다. 캡틴은 크리스토퍼 파이크(제프리 헌터 / Jeffrey Hunter), 부함장 겸 일등 항해사는 여성인 넘버 원(마젤 바렛 / Majel Barrett)이 차지한다. 넘버 원은 일등 항해사를 칭하는 말인데, 모든 승무원들이 그녀의 이름 대신 넘버 원으로 부른다. 스팍은 함교 내 서열 3위인 과학 장교로 복무 중이다. 리더는 백인 남성이고, 왼팔 오른팔을 여성과 외계인이 담당하고 있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PC(Political Correctness)를 많이 고려한 배치다.
크리스토퍼 파이크 함장은 정의롭고 강직한 캐릭터다. 대신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 이것이 캡틴 커크와 가장 다른 점이다. 파이크는 넉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매사에 진지하다. 캡틴은 203명의 엔터프라이즈 호 승무원을 책임지는 자리라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얼마 전 리겔 7 행성에서의 전투로 승무원 3명을 잃은 직후라서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 파이크 함장은 무거운 짐을 벗고 고향 별에서 말 타며 한가로이 지내는 일상을 간절히 꿈꾼다.
배우 제프리 헌터는 존 포드(John Ford)의 걸작 웨스턴 <수색자(The Searchers)>(1956년)에서 인디언에 납치된 막내 카우보이 역을 맡아 유명해졌다. 그래서 웨스턴 전문 배우로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스타트랙>이 웨스턴의 테마를 우주로 확장시킨 작품임을 생각하면 안성맞춤인 캐스팅이다. <The Cage> 편이 방송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제프리 헌터는 <스타트랙>에서 하차한다. 이후 저예산 웨스턴 영화들에 출연하며 경력을 이어가던 헌터는 갑작스러운 마비 증상으로 1969년 5월 27일 사망한다. 공교롭게 <스타트랙 TOS> 종영일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렇게 끝이 날 것 같았던 파이크 함장은 21세기에 다시 부활한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이전 시대를 다룬 <스타트랙 : 디스커버리> 시즌2에 파이크 함장이 등장하고, 2020년에 공개된 <스타트랙 : 스트레인지 뉴 월드>는 엔터프라이즈 호 캡틴이 된 파이크와 넘버원, 스팍의 모험담을 다룬다. 이 시리즈는 스타트랙 최초의 파일럿 <The Cage>의 이야기를 55년 후에 다시 이어가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파일럿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명의 배우는 지적인 외모가 돋보이는 '넘버 원' 마젤 바렛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여성 장교가 특별할 게 없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거슬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후에 진 로든베리는 NBC 측이 여자 부함장을 적극 반대해서 바렛이 하차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사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었던 1960년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마젤 바렛은 정규 시즌 때 의사 채플 역으로 다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이후 제작된 스타트렉 시리즈 & 영화에서 함선 시스템 목소리 더빙을 도맡으며 프랜차이즈의 상징이 되었다. 사실 그녀는 제작자 진 로든베리와 연인 관계였다.
2. 스팍
앞서도 언급했지만 두 번째 파일럿 <Where No Man has Gone Before>을 만들 때 로든베리는 주인공 '파이크 함장' 제프리 헌터를 포함, 출연진 전원을 싹 갈아엎었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배우가 있으니 바로 '스팍' 레너드 니모이다. 스팍은 SF 시리즈 <스타트랙>의 정체성을 외모 - 위로 솟구친 갈매기 눈썹, 어중간한 길이의 뱅 헤어스타일, 그리고 뾰족한 귀 - 로 상징한다.
스팍은 <스타트랙>에서 가장 인기 많은 캐릭터다. 감정 없이 이성과 논리만으로 사고하는 스팍, 낭만의 대명사 닥터 맥코이, 이 둘을 합친 것 같은 캡틴 커크의 트라이앵글이 <스타트랙>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하지만 <The Cage>를 제작할 시점엔 스팍에 대한 설정이 여물기 전이었다. 절대 웃지 않는 스팍이 불모의 행성이라는 탈로스 Ⅳ에서 식물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는다.
3. 보이지 않는 위험
<The Cage> 편은 부상자들의 치료와 보급을 위해 식민지 행성으로 향하던 엔터프라이즈 호가 탈로스 Ⅳ에서 발신된 조난 신호에 반응하며 시작된다. 스팍 등과 함께 상륙한 파이크 함장은 백발이 다 된 노인들을 발견하는데, 스스로를 18년 전 우주선 사고로 불시착한 과학자들이라 소개한다. 이들 중 뜻밖의 젊은 여성 비나(수잔 올리버 / Susan Oliver)에게 남자 승무원들의 이목이 쏠린다. 눈부신 미모로 성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비나는 스스로는 정작 자신의 매력을 모르는 것처럼 군다. 그것이 더욱 남자들을 자극한다. 생존자의 신체검사 등 승선 준비로 분주한 동안 비나는 보여줄 게 있다며 파이크 함장을 어딘가로 유인한다. 파이크도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 방심한 사이 파이크는 지하 세계로 납치되고, 생존 과학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캡틴을 잃은 엔터프라이즈 호는 선체의 모든 기능 또한 정지되고, 파이크 함장은 우리 속에 갇힌 동물 신세로 전락한다.
4. 가상현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셧 다운, 최초 접수한 조난신호, 생존 과학자들, 비나의 존재 모두는 탈로이안이 만든 강력한 환상 때문이다. 수천 세기 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별! 살아남은 탈로이안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특별히 할 게 없다 보니 정신 수련에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두뇌가 고도로 계발됐고, 상대의 생각은 물론 감정까지 읽을 수 있게 됐다. 지금에 와서 탈로이안은 외계 생명체를 납치, 일종의 가상현실 속에 가두고 그 안에서 외계생명체들의 희로애락을 대리체험 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 된 것이다. 가상체험을 지속하기 위해선 납치해 온 외계종족들의 번식이 필요하다. 비나는 탈로이안이 예전에 잡아왔던 인간 여성이었고, 그녀와 짝짓기 할 튼튼한 수컷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으로 파이크 함장이 지목된 것이다. 수천 명의 탈로이안들이 파이크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대사마저 등장한다.
5. 녹색의 천사
에피소드 초반부에 파이크 함장이 승무원이자 젊은 여성 콜트 하사(로렐 굿윈 / Laurel Goodwin)와 함교에서 부딪힐 뻔하는 장면이 나온다. 잠깐의 접촉(?)인데도 오묘한 성적 긴장감이 흐른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함교 내의 또 다른 여성 넘버 원은 본능적으로 이를 감지한다. 파이크 함장이 "함교에 여자가 있는 게 어색해서 그래"라고 둘러대자 넘버 원은 눈에 띄게 실망한다. 이 말인즉슨 파이크의 눈에 넘버원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The Cage> 편의 스토리 기저에는 파이크 함장의 억압된 성적 욕망이 있다. 넘버원과 콜트는 파이크 함장의 여자가 되길 원한다, 반면, 파이크는 캡틴이란 지위 때문에 이성적 감정을 억제하고 숨긴다. 전형적인 중년 남성 판타지가 아닌가.
파이크를 납치한 탈로이안들은 그가 평소 꿈꾸던 성적 판타지를 생생한 가상현실로 만들어 제공한다. 파이크가 그토록 원했던 고향별에서의 안락한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비나는 어느샌가 정숙한 아내로 변해 파이크의 옆에 서 있다. 탈로이안들의 예상과 달리 파이크는 판타지 속에서 안주하길 거부한다. 그래서 더욱 강도 높은 환락이 제공되니, 비니가 초록색 피부의 성노예로 변해 자극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유혹('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줄게요.')을 해 온다. 파이크는 석가모니처럼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여 '환상특급'에서 스스로 내린다. 비나와의 짝짓기를 거부한 파이크게에 탈로이안들은 유황불에 떨어지는 고통 환상으로 벌을 준다.
'비나'를 연기한 수잔 올리버는 차력쇼에 가까운 1인 다역으로 <The Cage> 편을 하드 캐리 했다. 순진한 여성, 정숙한 여성, 괴물에게 위협받는 공주, 녹색 피부의 성노예, 결말부의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신하며 팔색조와 같은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녹색의 비나는 스타트랙 팬들에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녹색 비나에 대선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수잔 올리버가 이 장면을 연기할 때 빡센 촬영일정으로 피로를 호소했다. 프로듀서는 수액주사를 맞히게 하려고 분장실로 의사를 불렀는데, 이 의사는 온몸에 녹색 분장을 한 수잔 올리버를 보고 기겁을 했다. 정맥을 찾아야 하는데 녹색칠을 해 놔서 애를 먹었던 것.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는 녹색 비나 분장 테스트를 한 사람이 넘버 원 역의 마젤 바렛이었다. 수잔 올리버가 해야 되지만 배우 스케줄 때문에 당시 현장에 있던 마젤이 총대를 메었다. 그녀는 후에 '몸값도 쌌고, 하필 그때 거기 있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녹색이 화면에 제대로 살아나지 않아 3일 연장 녹색 페인트를 배우 몸에 덧칠을 했는데, 스태프들이 나중에 현상 작업 때 색조 조정을 할 수 있음을 알고 망연자실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6. 하렘
끝끝내 비나와의 동침을 거부하는 파이크 때문에 탈로이안은 엔터프라이즈 호에서 두 명의 여성, 넘버 원과 콜트를 추가로 납치해 온다. 탈로이안은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며 파이크에게 배우자 선택을 강요한다. 넘버 원은 여성성이 떨어지지만 머리 좋은 2세를 낳을 수 있다는 장점이, 콜트는 무엇보다 여성성과 체력이 강점이라 소개한다. 여성들은 무례함에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표정들을 보면 은근히 파이크에게 선택받기를 기대하는 눈치가 감지된다. 시나리오를 쓴 진 로든베리의 일부다처제에 대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7. 60년대 TV시리즈를 60년 후에 본다는 즐거움
파이크와 두 명의 여성 승무원들은 탈로이안에게 벗어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자폭을 결심한다. 동물원에 갇힌 짐승처럼 던져주는 먹이와 환상에 만족하고 살기에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는다. 탈로이안은 이것이 블러핑이 아님을 깨닫고 파이크와 엔터프라이즈호를 풀어준다. 인간이 너무나도 파괴적이고 위험한 존재라 그들로선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환상이 모두 걷히며 비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사실 비나는 우주선 추락사고로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큰 부상을 입었다. 탈로이안 덕분에 목숨은 구했지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이 외계인들은 인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비나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비나는 흉측해진 본모습으로 살기보다, 탈로스Ⅳ 행성에 남아있길 원한다. 환상 속에서 파이크 함장과 함께 즐거워하는 비나를 보는 데 코 끝이 찡해질 정도의 감정이 올라온다.
<The Cage>는 분명 옛날 드라마다. 촬영, 편집, 음악, 배우들의 연기 방식에서 올드함이 잔뜩 묻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몰입하며 봤다. <트루먼 쇼>, <매트릭스>, <혹성탈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스토리가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플롯 아래 끈적하게 흐르는 성적인 부분들이 원초적 본능을 끊임없이 건드린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인지, 지금의 젊은 관객들은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8. 에피소드 정보
<The Cage> 편은 1964년 11월 27일에서 12월 18일까지 촬영을 진행했다. 원래 일정에서 5일이 초과되었고, 후반작업을 거쳐 이듬해 65년 2월에 NBC 이사진 대상으로 시사를 가졌다. 제작사는 루씰 볼(Lucille Ball)이 이끌었던 데실루 프로덕션(Desilu Production)이다. 데실루는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의 전신으로, 1960년대 초중반까지 미국에서 가장 큰 TV 독립제작사였다. <미션 임파서블>도 이 회사에서 나온 시리즈다.
감독 로버트 버틀러(Robert Butler)는 50년대 후반부터 TV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연출가이다. 80년대 미드의 팬들이라면 각별한 작품 <블루문 특급(Moonlighting)>의 파일럿도 그의 솜씨다. 영화로는 90년대 국내 비디오 렌탈 시장에서 꽤나 인기 있었던 <터뷸런스(Turbulence)>(1997년)가 있다. 각본은 제작 겸 크리이에터 진 로든베리가 직접 썼다. 유명한 테마는 알렉산더 커리지(Alexander Courage)가 썼고, 촬영은 윌리엄 E. 스나이더(William E. Snyder), 편집은 리오 H. 쉬리브(Leo H. Shreve), 프로덕션 디자인은 파토 구즈먼(Pato Guzman), 미술에 프란츠 바첼린(Franz Bachelin), 매트 페인팅은 1975년 <대지진(Earthquake)>으로 오스카를 수상한 앨버트 휘트록(Alvert Whitlock)이 솜씨를 발휘했다.
<스타트랙>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을 하나 꼽으라면 함교(Bridge)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리지널 시리즈(이하 TOS - The Original Series)는 저예산 TV 드라마라 우주의 풍광, 함선 간의 전투를 직접 묘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수함 영화처럼 함교 내부에서 배우들의 리액션 만으로 스토리를 끌고 간다. 함교 세트에 공을 아주 많이 들였다. 그래서인지 <The Cage>편에선 카메라가 부감으로 함교 전체를 내려다 보는 씬이 자주 등장한다. 승무원들이 다루는 기기와 소품에선 그 당시 제작진이 생각한 Futuristic한 디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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