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시카고 선 타임스(Chicago Sun Times)의 편집장 나이젤 웨이드(Nigel Wade)를 찾아갔다. 영화사의 걸작들을 되돌아보는 긴 호흡의 시리즈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하자고 제안했다. 대중들의 영화 취향이 점점 하향평준화 되어 갔고, 로저 이버트 또한 개봉작 리뷰만을 쓰다 보니 소모되는 느낌이 들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의 제안은 데스크를 통과했다. 연재 시리즈의 제목은 'The Great Movies'로 정해졌다. 이 기획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당연히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도 <위대한 영화>가 최보은/윤철희 번역으로 2003년 (주)을유문화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이 책은 꾸준한 인기를 모았고, 2019년에 제 3판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제3판은 로저 이버트가 사망 전까지 썼던 시리즈의 모든 글을 4권의 책으로 엮었다.
나는 로저 이버트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은 쉽고, 본능적이면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가 이야기하는 영화를 독자로 하여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글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로저 이버트를 기리는 마음으로 <위대한 영화>에 소개된 모든 리뷰를 따라가 보려 한다. 글 말미엔 예고편 영상을 링크해 둔다. 이 포스팅의 목적은 그가 <위대한 영화> 기획을 시작한 것과 같다. 아직 못 본 영화라면 찾아서 보고, 이미 본 영화라면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1. 머리말
모든 영화광들이 갖게 되는 딜레마는 인생은 유한한데, 볼 영화는 많다는 것이다. 로저 이버트는 개봉 영화 전문 리뷰어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사나이다. 그가 이 기획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고, 이 작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밝히고 있는 머리말은 꽤나 감동적이다.
로저 이버트에게 '위대한 영화'는 자기 인생의 기억과 같은 의미다. 하와이 영화제에서 일본 영화 최고 권위자인 도널드 리치(Donald Richie)와 함께 오스 야스지로(小津 安二郎)의 <부초(浮草)>(1959년)를 봤던 순간, 편집자 셀마 슌메이커(Thelma Schoonmaker)와 함께 <분노의 주먹(Raging Bull)>(1980년)을 본 기억, 그리고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시티 라이츠(City Lights)> 상영이 끝나고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직접 등장해 관객들에게 인사하던 날의 기억... 그리고 위대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위대한 감독들과 친구가 되는 일이라 적는다.
"'루이스 브뉴엘(Luis Buñuel)은 인간의 본성이 파렴치 하다는 사실을 즐거워했다. 가톨릭 신자인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esese) 감독은 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끔찍한 괴로움 때문에 영화를 만들었다.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는 개인을 경시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찬양했다.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은 사람들이 행복하려고 저지르는 일에 대경실색했다. 알프레드 히치콕(Afred Hitchcok) 감독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꿈과 유사한 특징을 담은 이미지들을 창조해 냈다. 영화 애호가라면 언젠가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오즈의 세계에 들어서면 영화가 사물의 움직임을 다루는 예술이 아니라 움직여야 할 지 말지를 다루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내쉬빌(Nashvielle)
감독 : 로버트 알트만
주연 : 데이비드 아킨, 바바라 백슬리, 네드 비티 등
개봉년도 : 1975년
상영시간 : 160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에서 줄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캐릭터다.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아도, 캐릭터는 분명 기억에 남는다. <내쉬빌>은 대통령 후보 예비 선거를 앞둔 5일간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중요한 인물만 25명 이상이라는 점이다. 주연급 캐릭터가 이렇게나 많으니, 당연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많다.
인물들은 화면에 안 나올 때도 각자의 삶을 이어가다 다시 마주치길 반복한다. 전매특허인 오버 래핑 대사는 한 번에 한 사람만 말하는 영화의 도식을 거부하는 몸부림이다. 알트만은 이 시도를 위해 녹음 시스템을 새로 개발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에게 <부기 나이트(Boogie Night)>(1997년)와 <매그놀리아(Magnolia)>(1999년)을 위한 길을 닦아주었다.
인생은 영화처럼 단선적이지 않다. 예외, 혼란, 우연,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쉬빌>을 보고 나서 로저 이버트가 얻은 메시지라고 한다. "미국의 백인감독 중에 거의 유일하게 세상에는 많은 흑인이 살면서 일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 감독'이기도 하다.
3. 네트워크(Network)
감독 : 시드니 루멧
출연: 페이 더너웨이, 윌리엄 홀덴
개봉년도 : 1976년
상영시간 : 121분
1970년대는 수작이 흥행이 되는,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네트워크>는 7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다. 로저 이버트는 의식의 흐름대로 <네트워크>를 조망한다. 이 영화는 풍자극에서 광대극으로, 그다음은 사회적 격분을 일으키는 내용으로 교묘하게 기어를 바꾼다. 당시 대중은 피터 핀치가 연기한 '하워드 빌'에 열광했다. 방송국에서 해고된 하워드 빌은 마지막 고별 방송에서 미친 사람처럼 속마음을 방송 중에 시원하게 질러 버린다. 방송 사고를 냈음에도 되려 시청율이 폭등하자, 하워드 빌은 앵커로서 생명연장을 얻게 된다.
<네트워크>는 텔레비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로저 이버트는 지금에 와서 보면 이 영화가 매스미디어에 관한 한 편의 예언서라 말한다. 사람들 머릿속에 <네트워크>는 '하워드 빌'이란 인물로 각인되어 있는데, 사실 그는 조연에 불과했다. 진짜 주인공은 인생의 별의별 맛을 다 본 중년의 보도국 임원 맥스(윌리엄 홀든)와 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야심녀 다이애나(페이 더너웨이)다. 하워드 빌의 미치광이짓 반대 편에 맥스와 다이애나의 불륜극이 있다. 로저 이버트는 다이애나 보다 윌리엄 홀든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다.
윌리엄 홀든이 누구더냐.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에서 피로감에 절어있는 중년의 총잡이를 연기한 인물이다. 총잡이는 구역질 나는 세상을 참다가 결국 장렬한 자살극을 벌이는 역할이었다. 로저 이버트는 윌리엄 홀든, 페이 더너웨이, 피터 핀치 외에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비어트리스 스트레이트, 네드 비티, 로버트 듀발의 훌륭한 연기를 잊지 않고 언급한다.
글의 말미에 감독 시드니 루멧에 대해 인상적인 평을 남겼다. 시드니 루멧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영화를 연출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 리버 피닉스의 반항적인 얼굴이 인상적이었던 <허공에의 질주>, 폴 뉴먼과 함께 한 걸작 법정극 <심판>, 알 파치노의 <뜨거운 날의 오후>가 대표작이라 하겠다. 로저 이버트는 그의 필모를 '우등생 명부'에 비유한다. 시드니 루멧은 '스타일보다 스토리에 관심을 쏟았던 감독으로, 업계 외부보다 내부 사람들에게 더 높이 평가' 받았던 감독이다. '특히 까다로운 스토리를 들려 줄, 딱 알맞은 방식을 찾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다. <네트워크>는 각각의 배우들이 뿜는, 서로 다른 에너지가 공존한다. '시드니 루멧의 절제된 연출력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지, 다른 감독이었다면 산으로 갔을 거라' 호언장담한다.
4. 노스페라투(Nosferatu)
감독 : F.W. 무르나우
주연 : 막스 슈렉, 구스타프 폰 방겐하임, 그레타 슈뢰더
제작연도 : 1922년
상영시간 : 94분
브람 스토커의 유족들이 소송을 걸어 무르나우는 <드라큘라>를 제목으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노스페라투>라고 제목을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드라큘라 영화 중 가장 생명력이 긴 작품으로 남았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 영화가 생기기 이전의 뱀파이어 영화'다. 드라큘라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기 전의 영화라 클리셰가 있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자기가 다루는 소재에 경외심을 품고 있다.'
막스 슈렉은 후대의 드라큘라 배우들, 벨라 루고시나 크리스토퍼 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연기를 한다.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연기다. 로저 이버트는 베르너 헤어조크가 연출하고, 클라우스 킨스키가 드라큘라를 연기한 동명의 1979년 리메이크작만이 이 경지에 겨우 근접했다고 평가한다.
무르나우는 <노스페라투>와 <마지막 웃음>(1924)으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폭스사와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진출했고, <타부>(1931년) 시사회가 열리기 직전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때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은 대사 자막을 거의 쓰지 않고서도 관객에게 완벽한 스토리를 이해시킨다. 영화가 꼭 배우의 목소리를 들려줄 필요가 있을까? <노스페라투>는 무성영화라서 더 효과적이다. "밤에만 살아가는 존재들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희생자들이 잠든 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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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Strangelove)감독 : 스탠리 큐브릭주연 : 피터 셀러스, 조지 C. 스콧제작 : 1964년상영시간 : 95분정말 감탄하며 읽은 리뷰다. 로저 이버트는 글을 참 쉽게 쓴다. 그러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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