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은 유재하 본인이 전곡을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했고, 모든 건반과 기타까지 직접 연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플루트, 현악,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등 클래식 악기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이 주효했다. 갖고 있는 자원을 최대치로 뽑아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자꾸만 상상을 하게 만든다. 만약 유재하가 두 번째, 세 번째 앨범을 만들 수 있었다면 어떤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을까?
1. 우리들의 사랑
앨범 첫 번째 트랙 <우리들의 사랑>은 폭죽과 같은 드럼 연주로 포문을 연다. 이 노래는 사랑에 대한 찬가다. 연인을 향한 마음은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부풀어 오른다. 곡의 후반에 가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숨이 터질 듯 뜀박질하는 청년의 이미지가 머리에 그려진다. <우리들의 사랑>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 환희의 순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어트랙션과 같은 노래다.
놀이동산의 어트랙션이 정교한 물리 법칙의 산물인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정교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노래 시작부에 클라이맥스 구간을 뚝 잘라 놓은 듯한 전주가 흐른다. 유재하는 이 전주를 노래에서 총 세 번(시작, 1절 후, 그리고 2절 후) 반복하는데, 그럴 때마다 곡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이 반복은 2절이 끝난 직후 노래가 끝날 듯하다 갑자기 치고 나오는 간주부 기타 솔로, 그 멜로디의 쾌감을 극대화시킨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은 엇박 역시 다 계획이 있다. 이는 마치 현실과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마음 속 공간을 상징한다. 그러다 후렴에 가면 보컬 멜로디, 화음을 연주하는 키보드와 리듬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다. 곡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후렴 리프라이즈 구간에서 또 한 번 박자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때는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듯 하면서 봉인해제된 기타 애드리브가 환희의 멜로디를 열정적으로 연주한다. 'Get High'가 따로 없다.
2. 그대 내 품에
고음의 스트링 연주로 시작해 피아노 건반이 점점 낮게 하강하는 전주는 주변의 공기를 차분하게 만든다. 유재하는 조금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사랑을 고백하는데, 이것이 숭고함마저 들게 하는 멜로디와 맞물려 상승효과를 만든다. 이 노래는 참 따라 부르기 힘들다. 리듬은 느린 대신 일정하며, 한 음 한 음이 길게 이어진다. 맛깔나게 노래하는 가수가 불렀다면 뺀질거리는 바람둥이의 고백처럼 들렸을 테다.
코드를 치는 피아노 건반 연주 하나로만 이어지던 노래는 프리 코러스 구간에 이르러서야 감정 그래프가 올라간다. 플루트가 천사의 나팔소리처럼 사운드의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하면 전율마저 든다. 후렴에서 플루트 라인은 물안개처럼 곡의 수면을 덮다가 하늘로 비상한다. 1절이 끝나면 전주의 스트링 구간이 반복되며 2절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이런 편곡은 유재하 1집 앨범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2절은 스트링, 플루트 같은 악기가 본격적으로 함께 하며 1절과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나는 특히 '내 취한 두 눈에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이란 구절을 좋아한다. 상대의 얼굴만 봐도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심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가사다. 분위기를 확 바꾸는 브리지 멜로디에 스트링이 어우러져 더욱 풍성해지는 곡의 후반부는 감정을 절정으로 끌고 간다. 언젠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밤 산책길에 이 노래를 듣다 눈물 흘린 적이 있다. 그때 이후 <그대 내품에>를 들으면 그때의 바람이 얼굴에 닿는 듯하다.
3. 텅 빈 오늘밤
<텅빈 오늘밤>은 앨범 안에서 여러모로 도드라진 곡이라 할 수 있다. 차갑고 모던한 사운드가 <우리들의 사랑>과 <그대 내 품에> 다음에 배치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자세를 고쳐 잡게 만든다. 돌연한 변화는 곡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그렇게도 소중했던 사랑인데 ‘싸늘한 눈빛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는 떠나가고 영문도 모르는 채 그곳에 한동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곡은 분노와 허무의 감정을 노래한다.
펑키한 리듬, 질주하는 베이스, 반항적으로 툭툭 내뱉는 보컬은 이별에도 아무렇지 않다, 갈 테면 가라지 같은 반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나. 겉으론 차갑게 굴어도 속은 슬프고, 애절한 감정일 수 밖에 없다. 이 정조를 2절 “행여나 돌아올까. 서러운 눈물이 가득 고여”가 나올 때 코러스를(펑키한 락 넘버에서 화음 멜로디로 감정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가왕‘ 조용필의 전매특허이기도 하다) 덧붙여 기막히게 표현한다. 감정의 폭발, 카타르시스는 2절 이후 간주부 기타 솔로의 차지다. 곡이 마무리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다 기타 솔로가 오토바이처럼 질주한다. 이를 받쳐주기 위해 메인 테마를 치는 또 다른 기타 연주도 주의 깊게 들을 것.
4.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텅빈 오늘밤>의 분노가 <내마음에 비친 내모습>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 다짐으로 갈무리된다. 이별하면 비장한 마이너 풍만 떠올리던 시절에 유재하는 데이비드 포스터 스타일의 팝 발라드를 이 곡에서 실험한다. 메이저 음계, '벌스 - 프리 코러스 - 후렴 - 브리지 - 후렴'의 구조(이 앨범의 다른 수록곡도 마찬가지) 등 90년대 한국 팝 발라드의 전형을 제시한 곡으로 평가된다. 세련된 멜로디와 키보드 텍스츄어 하나에만 집중한 편곡 덕분에 발표된 지 40년 가까이 되는 노래임에도 세월을 타지 않았다. 원곡에 리듬만 바꾸면 트렌디한 R&B 트랙이 된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많은 후배가수들에 의해 재해석됐다.
5. Minuet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앨범의 A면 마지막은 연주곡 <Minuet>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땐 창작곡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현악 편성의 이 연주곡은 유재하가 클래식 전공자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앨범의 서사를 쭉 따라가다보면 <Minuet>는 A면과 B면을 잇는 가교이자 연극에서의 막 같은 전환점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사용되는 몽타주 시퀀스와 그 쓰임이 비슷하다. 슈베르트 연가곡 <Die Winterreise>를 메인 테마로 삼았던 멜로영화 <겨울 나그네>의 감성을 이 앨범에 가져오려 한 시도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6. 가리워진 길
김현식 3집의 수록곡으로 먼저 발표된 적이 있는 <가리워진 길>은 앞선 <Minuet>과 같이 들어야 비로소 진가가 발휘된다. 기타, 베이스, 드럼을 배제하고 피아노, 현악, 플루트 등 클래식한 편곡으로 일관한 이유도, 수록곡 중 가장 짧은 러닝타임인 것도 다 여기에 있다. 실연 이후 분노, 허무, 자아성찰의 과정을 거쳐 <가리워진 길>에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목표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토로한다. 이제 노래의 화자에게 삶은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쌓인 길"이다. 이 절망의 끝에서 유재하는 후렴에서 다시 '그대'를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종교처럼 신앙,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성(聖)스러운 사랑'이란 테마는 앨범의 마지막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사랑하기 때문에>로 연결된다.
7. 지난 날
밝은 분위기의 곡이지만 <우리들의 추억>과는 완전히 다른 '밝음'이다. <지난날>은 과거의 내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고 다짐한다. 이런 심정의 변화는 고통, 상처를 전제로 한다. 후렴부에 계속 깔리는 이문세의 코러스는 포근하게 상처를 덮어주는 담요와 같다. 코드 진행, 전조, 템포 변화 등 음악적으로 복잡한 곡임에도 편안하게 들린다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퓨전 재즈를 가요에 접목한 거의 최초의 시도이며, 요즘 세대들이 한국 시티팝의 명곡이라 재평가하고 있는 김현철 1집의 <동네>, <오랜만에>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8. 우울한 편지
보사노바 <우울한 편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 이 노래를 쓴 것은 이 곡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사노바는 라운지 음악이라 휴양지와 해변가가 먼저 떠오른다. 유재하는 나른한 분위기의 이국적인 장르에 가요적인 순정의 가사를 결합시켰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놓친 사랑에 대한 후회와 미련의 정서가 보사노바와 이리 잘 맞을 수 있나 들을 때마다 무릎을 친다. 멜랑꼴리한 감성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간주부의 피아노 솔로는 한국 가요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9.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는 이 앨범 속 사랑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끝맺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만난 사랑에 벅찬 감동과 감사한 마음을 정말이지 간절하게 노래한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앨범을 쭉 들어야 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앨범과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다. 이 곡은 아마도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가요 중 하나일 텐데 역설적으로 그 어떤 버전도 원곡의 아우라를 뛰어넘지 못했다. 한국 가요에서 최고의 전주를 꼽으라면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사랑하기 때문에>다.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완벽한 편곡이다. 1절은 오롯이 클래식 편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압권은 클라리넷과 오보에의 사용이다. 들을 때 마다 저절로 눈을 감게 되고,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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