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년대 홍콩영화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린 세 명의 영화인이 신인 시절에 한 영화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소룡 신드롬과 더불어 우후죽순 쏟아졌던 저예산 쿵후액션 중 하나인 <제패>는 원화평이 무술연출, 오우삼이 조감독, 그리고 성룡이 단역과 스턴트맨으로 참여했다. 영화 자체는 당시 유행하던 스파게티 웨스턴을 쿵후 액션 장르로 번안한 수준이다. 저예산이라 로케이션 분량이 대부분이고, 촬영과 미술 등도 평이하다. 그런데 스토리와 인물의 감정은 엄청 비장하여 여기서 나오는 언밸런스가 묘한 매력을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재앙과 같은 영화지만 70년대 쿵후액션영화를 좋아하거나, 오우삼-원화평-성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꽤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영화가 반환점을 돌고 나면 나머지는 싸움과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며, 단순히 싸구려 쿵후영화라 치부하기에 액션 시퀀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또한 이 영화의 액션은 오우삼의 연출 데뷔작 <철한유정>가 유사점이 많다.
기초 정보
1973년, 제국영업(帝國影業 / Emperor Film International)이라는 인디 영화사가 <제패>를 제작했다. 영화는 싼 값에 전 세계로 수출되어 변두리 동시상영 극장, 그리고 비디오 렌탈 시장으로 퍼졌다. 감독은 주환연(朱煥然 / Jimmy L. Pascual)으로 각본, 제작까지 겸한 것으로 크레디트에 올라 있지만 연출경험은 전무하다. 이 때문에 장철 연출부를 관두고 암중모색기에 있던 오우삼(吳宇森 / John Woo)이 급히 조연출로 투입됐다.
훗날 홍콩의 액션 마에스트로가 되는 원화평(袁和平 / Yuen Wo Ping)이 액션연출을 했다. 원화평이 액션감독이니 그 아버지 원소전, 동생 원상인(袁祥仁 / Yuen Cheung Yan), 원신의의 얼굴도 볼 수 있다. 또 같은 우점원 경극학원 출신 원화, 원무, 성룡(成龍 / Jackie Chan)이 무술연기자 및 단역으로 출연한다. 성룡, 오우삼, 원화평이라는 홍콩영화의 레전드 세 사람이 막 커리어를 시작할 무렵에 <제패>에서 만났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니 지금의 처지에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 인생,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의 복수
영화는 20세기 초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경찰 학교 졸업식에서 주인공 우양(于洋 / Henry Yu Yang)은 울적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다른 졸업생들은 가족, 친지들의 축하를 받는데, 우양은 수석을 차지했어도 천애고아라 찾아 올 이 하나 없다. 우양은 곧이어 경찰학교 교장(이윤중 / 李允中 / Lee Wan Chung)을 만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정체를 듣게 된다. 아버지는 심복에게 배신을 당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원수는 이후 한 마을에 똬리를 틀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 자리에서 교장은 첫 번째 임무로 아버지의 복수를 지시한다.
주연을 맡은 우양은 (于洋 / Henry Yu Yang)은 쇼브라더스 남국실험극단(南國實驗劇團) 제8기생 출신으로 쇼 브라더스와 인디 쿵후 영화 등에서 활약한 연기자다. 크게 성공한 배우는 아닌데 오우삼은 이 작품 <제패>에서 우양과 작업한 후 자신의 감독 데뷔작 <철한유정>의 주연을 맡긴다. 오우삼 특유의 영웅 캐릭터의 출발이 바로 우양이다.
히어로, 우양(于洋 / Henry Yu Yang)
그리하여 우양은 서부극의 영웅처럼 말을 타고 낯선 마을에 도착한다. 동시에 여섯 명의 악한도 이 마을에 당도한다. 영화는 악당의 시선으로 황량한 마을을 둘러본다. 서부극의 무법자들이 살롱으로 향하듯, 이 영화의 악당들은 ‘당연히’ 객잔으로 간다. 험상궃은 사내들의 등장으로 객잔 안은 일순 긴장감이 감돈다. 실내에 만취한 늙은 주정뱅이가 보이니, 그는 영화의 무술감독을 맡은 원화평의 아버지, 훗날 성룡의 <취권>에서 괴짜 사부 소화자를 연기한 원소전(袁小田 / Simon Yuen Siu Tin)이다. 객잔 주인 손암(孫巖 / Sun Lan)은 악한들을 최선을 다해 환대한다.
한편 우양은 눈 먼 여인 우혜(尤慧 / Ofelia Yau Wai)와 그녀의 동생 한국재(韓國材 / Hon Kwok Choi)를 만난다. 가난한 남매가 소달구지를 끌고 힘겹게 산을 내려가는데 악한 둘이 도와준다는 구실로 접근해 우혜를 범하려 한다. 이때 나타난 우양이 우혜를 구해낸다. 우양은 둘 중 하나는 때려죽이고, 다른 하나는 오른팔을 부러트린다. 액션보다 더 와닿는 장면은 우혜가 은인의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며 우양의 이목구비를 손으로 더듬는 장면이다. 앞을 볼 수 없는 여인과 남성 영웅의 로맨스는 <첩혈쌍웅>의 감정선을 떠올리게 한다.
악인들
객잔주인 손암은 6명의 악인을 이 마을의 실력자이자 우양의 원수 황종신(黃宗迅 / Huang Tsung Hsun)에게 데려간다. 황종신은 우양이 복수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일종의 용병으로 이들을 고용했다. 황종신의 저택을 지키는 여러 깡패 무리 중에 앳된 성룡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황종신을 만나고 객잔으로 돌아온 용병들은 술과 음식, 그리고 미모의 여인들까지 자신들 몫임을 알고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여자들 중 진청(陳菁 / Lily Chen Ching)이란 여배우는 압도적인 아우라로 객잔 안의 뭇남성들을 홀린다. 영화는 주인공을 잠시 내버려두고, 6인 용병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이들은 주사위 도박을 하는데, 그중 머리를 길게 땋고, 화장을 한 양소화(梁少華 / Leung Siu Wah)가 시선을 끈다. 그는 동료하고 게임을 할 때도 속임수를 써서 돈을 뺏는다.
상대를 알다!!
주인공 우양이 죽인 사내는 용병들의 동료였다. 오른팔을 잃고 객잔으로 동료를 찾아온 악인을 통해 우양의 존재를 알게 된다. 때마침 우양도 맹인 남매를 앞세워 마을로 들어온다. 보란 듯이 자기가 죽인 악인의 시체를 말에 싣고 왔다. 놀랍게도 이 마을에도 경찰이 있다. 늙은 사내 혼자 법 집행을 하고 있으니 경찰이라기보다 서부영화 속 보안관이라고 보면 맞다. 이 보안관은 우양이 죽인 남자가 현상수배범인 것을 알아본다. 우양은 자기 신분을 밝히자, 보안관은 기다렸다는 듯 이 고장을 지배하는 황종신의 무서움을 전한다.
한편 맹인 소녀 우혜는 우양을 찾아가 감사인사로 저녁 초대를 한다. 불쌍한 처지의 여인이지만 아름다운 우혜의 청을 우양은 외면하지 않는다. 식사장면에서 우리는 객잔에서 봤던 술 주정뱅이 원소전이 우혜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우양은 우혜와 인간적인 교류를 나눈다. 큰 도시로 가서 치료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희망을 준다. 그리고 이 모습을 악당들과 한편인 객잔 주인 손암이 보게 된다.
악당 용병들도 술자리를 갖는다.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장면이 이어지는데, 모두가 여자를 껴안고 쾌락에 취할 때, 이상한 분위기의 양소화만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인 진청이 왜 양소화만 여자들과 놀지 않냐고 물으면 동료 중 하나가 양소화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답한다. (오우삼이 <첩혈쌍웅>으로 미국에 처음 알려질 당시 서구 평론가는 그의 영화에서 동성애적 코드를 읽었고, 여기에 대해 오우삼은 오해라고 답했다. 하지만 오우삼의 영화를 보면 어떤 식으로든 동성애적인 요소를 집어넣고 있다.) 얄팍한 베드씬 장면도 등장한다. 진청이 악당 중 하나와 잠자리를 갖는데, 손 대신 입으로 자기 옷을 벗겨 달라 요구한다. 이 장면이 그나마 불쾌함이 덜 한 것은 여자인 진청이 적극적으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결투의 시작
우혜와 헤어지고, 혼자 마을로 돌아가던 우양을 악당 중 2인이 습격한다. 조명이 충분하지 않아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화면이지만, 일 대 이의 대결은 귀를 찢는 타격음으로 심장박동을 빠르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우양이 얼굴에 연속으로 정타를 날리는 장면은 아픔이 느껴진다. 난데없이 늙은 보안관이 나타나 우양을 도와주러 나서지만 도리어 큰 부상을 당한다. 이 장면에서 우양의 비밀무기인 부메랑이 처음 소개된다. 우양은 부메랑으로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던 벌집을 건드려 악당을 곤경에 빠트린다. 이 시퀀스 이후부터 영화는 싸움과 싸움과 싸움의 연속으로 일관한다. 스토리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싸움과 싸움 사이에 잠깐 휴식을 취하는 용도에 불과하다.
고수들의 결투
분노한 우양은 단신으로 객잔을 쳐들어간다. 다행히 여기에는 객잔주인 손암과 게이 싸움꾼 양소화만 있는 상황. 양소화와 우양은 서부의 총잡이들처럼 거리로 나가 일 대 일 대결을 펼친다. 주먹을 교환하기 직전 서로의 거리와 간격을 재는 장면은 영락없는 서부영화다. 양소화의 주무기는 포니테일이었다. 긴 머리총 끝에 흉기가 달려있어, 머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우양을 코너로 몬다. <황비홍2 - 남아당자강>에서 이연걸과 견자단의 좁은 골목 대결 시퀀스의 아주 원시적인 데모 버젼 같다. 주고받는 결투의 합은 빠르고 인정사정없다. 우양은 양소화가 휘두르는 머리채를 낚아챈 후, 기둥에 한 바퀴 휘감은 다음 교수형 처한 듯 매달아 죽인다.
우혜의 비극
거리에 목 매달려 죽은 양소화를 목격한 후, 객잔주인 손암은 부하를 이끌고 우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순진한 우혜는 아무것도 모른 체 집 앞을 평화롭게 거니는데, 이때 영화 <대부>의 그 유명한 Love Theme가 흐른다. 이때만 해도 전세계가 저작권을 우습게 알 던 시절이었다. 손암과 부하들은 우혜를 백주 대낮에 납치한다. 이를 막으려던 우혜의 모는 악당들에게 몽둥이질을 당해 죽는데, 그 타격의 대부분은 얼굴을 향한다. 한국재는 두 명의 악당에게 단도로 배를 찔려 사망한다. 그리고 이 모습을 멀리서 원소전이 안타깝게 지켜본다.
쌓여가는 시체
이제 다시 포니테일이 목 매달려 죽어 있는 거리로 돌아온다. 용병 둘과 그들의 부하들이 죽은 포니테일을 보며 경악하는데, 이때 거리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낙엽이 흩날리는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우용이 높은 돌담 위에 우뚝 서서 악당들을 향해 소리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유도 영웅 <스가타 산시로>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우용은 곧바로 이들과 싸운다. 역시나 얼굴을 빠르게, 반복적으로 치는 결정타로 악당들을 때려죽인다. 여기서 맞아 죽는 단역들 중 클로즈업되는 영광을 누리는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스턴트맨 시절의 원화(元華 / Yuen Wah)이다.
부모님의 과거
우양은 6인의 용병 중 4인을 해치웠다. 이제 남은 이는 2명. 영화는 바로 황종신의 저택으로 전환, 남은 두 명의 최강자들이 메인 빌런 황종신 앞에서 자신들의 필살기를 자랑하는 장면을 기어코 보여준다. 한 명은 채찍의 달인이고, 다른 하나는 비도술이 특기다. 둘의 장기 자랑 장면이 끝나면, 곧바로 우양이 황종신의 저택 앞에 등장한다. 막아서는 수하들을 우양이 손쉽게 해치우고 황종신과 마주한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집어 넣은 드라마 장면이 이어지니, 황종신이 과거 우양 아버지의 부하였다가 경찰에 밀고하여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 충격에 어머니가 미쳐 버리는 플래쉬백이 뒤따른다. 황종신은 사실이 아니라고 우양 앞에서 절절하게 반론을 펼치는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품이 날 수밖에 없다. 옛날 영화는 꼭 악인에게 변명할 여지를 주다 도리어 공격당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난데없이 주정뱅이 원소전이 등장해 황종신의 추악한 과거를 증언하겠다고 나서다가 비도(飛刀)를 맞는다.
끝이 없는 싸움
분노한 우양과 황종신 일당과의 싸움이 펼쳐진다. 저택 앞에서 봉을 든 악인들과의 싸움을 시작으로, 이들을 해치우고 나면 좀 더 어려운 레벨의 싸움이 기다린다. 액션의 배경은 저택에서 암벽과 모래밭이 있는, 탁 트인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우양은 악당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다. 4인의 악당들이 밧줄로 우양의 팔다리를 한쪽씩 걸어 봉쇄한다. 이 상태로 우양은 모래밭(이 장면과 배경은 오우삼의 데뷔작 <철한유정>에서 반복된다)을 질질 끌려다닌다.
우양은 완력과 부메랑을 이용, 밧줄을 든 4인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마침내 채찍맨과 비도술 장인을 동시에 상대한다. 이 장면은 원화평, 성룡, 홍금보 등 80년대 액션 히어로들이 전성기 영화에서 구사했던 아크로바틱한 동작들과 스피디한 액션 편집으로 보는 이의 심박수를 높인다. 성룡의 전매특허라고 할까, 도망가는 척하다 앞으로 점프, 손목힘을 이용해 뒤로 도약하여 양발로 달려오는 상대의 가슴을 차는 동작도 나온다. 남은 것은 눈먼 여인 우혜를 인질로 삼아 마지막 발악하는 황종신을 처리하는 일이다. 놀랍게도 우양은 황종신을 죽이지 않고 생포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늙은 보안관과 우혜를 뒤로 하고, 죄인 황종신을 체포해 마을을 떠나는 우양의 뒷모습이다. <제패>는 헐리우드 서부활극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다시 아시아로 이동, 홍콩의 경극 배우들과 결합해 쿵후영화로 재활용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 내 인생에서 한 번 이면 족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의 표적(Marked for Death) 1990년 - 2부 줄거리 & 상세 정보 (0) | 2025.04.24 |
---|---|
죽음의 표적(Marked for Death) 1990년 - 1부 80년대풍 액션영화(리뷰편) (0) | 2025.04.09 |
맨헌트(追捕 / Man Hunt) 2017년 - 녹슨 총 (1) | 2024.11.13 |
용재소림(龍在少林 / Dragon in Shaolin) 1996년 - 중국룡으로 불렸던 '다이나믹' 듀오 (0) | 2024.05.08 |
캐논볼(The Cannonball Run) 1981년 - 이것은 영화인가, 배우들 친목 모임을 찍은 것인가 (0) | 2024.04.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