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가 연기하는 인물은 언제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추락과 상승을 극적으로 오간다. 이 운동 에너지가 주성치 영화의 주된 동력원일 것이다. <식신>의 주성치는 인기 셰프였다가 자만심 때문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소림축구>의 주성치는 무술 고수지만 현대 도시에선 넝마주이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온갖 천대를 견디다 결국 세계 제일의 축구선수가 된다. <쿵푸 허슬>의 주성치는 삼류 양아치인데 딱 한번 양심을 따르는 선택을 했다가 죽기 진전까지 간다. <무장원 소걸아>는 더욱 노골적이다. 권세 있는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거지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성공이 아니라 추락의 묘사다. 주성치 영화가 대중의 가슴에 오랫동안 살아 숨 쉬는 이유는 바닥에 떨어진 인물을 너무 실감 나게 연기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난센스 코미디임에도 주성치가 각 잡고 감정연기를 시작하면 그 순간만큼은 가슴 찡한 비극이 된다. <도성타왕>은 주성치의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타이오에서 철부지 도련님처럼 살았던 주소룡은 온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거리에서 차력쇼를 보여주고 약을 파는 신세로 전락한다. 주소룡은 비로소 자신을 향한 아모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당구 시합이 아닌 바로 이 대목이다.
타이오의 수치
주소룡의 패배로 타이오 섬은 쑥대밭이 된다. 용형이 주비홍의 땅을 차지하고, 수십 년간 주비홍에게 임대료를 내고 세 들어 살고 있던 많은 수의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집을 잃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타이오 섬으로 돌아온 주비홍과 주소룡은 잔뜩 몰려온 주민들에게 항의를 받는다. 주비홍은 경찰서에 끌려가서야 시합 보증 용도로 생각하고 서명한 서류가 매매 약정임을 알고 절망한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주민들의 원망까지 사게 된 주비홍은 멘탈이 나가 버린다.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주비홍과 주소룡은 사람들을 피해 좁고 어두운 곳에 숨어 지낸다. 그들은 이제 타이오의 수치가 되어 버렸다.
아모의 큰 사랑
사람들을 피해 숨어있던 주비홍 부자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아모다. 인생에 있어 고난이 닥쳤을 때 여자가 남자보다 더 담대히 맞서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다. 아모는 이렇게 도망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생각하라며 주비홍과 주소룡을 밖으로 끌어낸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아모는 일단 밥부터 먹으라며 식사를 챙겨주는데, 아버지 주비홍과 주소룡은 염치없게 돼지고기를 달라, 밥은 어떻게 해 달라 요구한다. 코미디를 의도한 대사지만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어떤 리얼함이 담겨 있다.
다음 날, 주비홍과 주소룡은 사람들이 나오기 전 이른 새벽에 몰래 타이오섬을 떠난다. 마중 나온 아모는 주소룡에게 힘내라며 손을 흔드는데, 주소룡은 비로소 아모의 넓고 큰 사랑을 깨닫는다. 작별의 순간, 주소룡은 아모를 향해 달려가고, 아모 역시 주소룡을 향해 팔을 활짝 벌린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두 사람의 러닝 포옹 장면이다. 주소룡과 아모는 격정을 느끼며 키스를 하고, 입맞춤을 끝낸 아모는 화들짝 놀라며 임신하면 어떡하냐며 호들갑을 떤다. 주성치는 머리를 감싸 지으며 내가 너무 성급했다고 후회한다. 키스에 아이가 생길 리 없으니 이는 난센스 코미디다. 하지만 주성치와 모순균의 후회, 자책의 연기는 너무나도 진지하니...<도성타왕>의 '임신유발키스' 장면은 팬들에게 전설이 되었다.
두 번째 기회
타이오 섬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주비홍과 주소룡은 홍콩 거리에서 차력쇼를 하며 힘들게 생활한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하지만, 불법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등 온갖 고생을 한다. 사기를 친 아인 역시 폐인처럼 지내다 주비홍-소룡 부자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상황에 절망할 무렵 타이오섬에서 연락이 온다. 타이오 섬의 대지주는 주비홍이지만, 아모의 아버지 역시 상당한 땅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모는 주소룡에 대한 사랑으로 집안 땅을 걸고 용형 일당과 또 한 번의 당구 시합을 추진한다. 용형은 주소룡의 변변찮은 실력을 직접 경험했기에 기꺼이 재대결을 응한다.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 주소룡은 용형에게 시합 조건 중 하나로 대대적인 홍보를 요구한다. 이제 월드 챔피언 지미 화이트와 타이오 섬을 대표하는 주소룡의 대결이 특설무대에서 펼쳐지게 된다.
<도성타왕>의 메인이벤트, 주소룡과 지미 화이트의 당구 시합은 <도성>의 포커 대결만큼 짜릿하지 않다. <도성>의 경우 트릭과 블러핑, 심지어 초능력까지 동원해 반전을 만들지만, 당구는 엄연히 스포츠라 시합 안에서 코미디와 승부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쉽지 않다. 경기 초반부는 지난번 승부의 복사판이다. 긴장에 짓눌린 주소룡은 쉬운 공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지미 화이트에 끌려간다. 겨우 얻게 된 절호의 찬스! 툭 치기만 해도 성공할 공이지만 주소룡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어려워한다. 타이오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주소룡은 힘겹게 득점에 성공한다. 그 순간 모두의 환호성이 터지고, 주소룡은 눈물을 훔치며 우승 트로피를 들고 감격한다. 바로 용형 측의 야유가 이어지고, 주소룡은 승리가 아닌 겨우 1포인트 득점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자리로 돌아온다. 이 난센스 코미디 한 방이 영화의 처진 분위기를 단번에 끌어올린다.
이때부터 기세가 오른 주소룡은 평상시 폼을 되찾고 드디어 지미 화이트와 호각세를 이루게 된다. 시합은 어느새 종반부로 접어들고, 마지막 한 점만 남은 상황!! 지미 화이트의 차례가 되자, 주소룡은 체면 따위 집어치우고 염력이라도 구사하는 듯 온 신경을 집중해 '실패하라' 주문을 외운다. 정성이 하늘에 통했는지 지미 화이트가 친 공이 빗나간다. 주소룡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데, 행복은 잠시, 지미가 친 공이 힘없이 굴러오더니 주소룡의 공 앞을 가로막고 선다. 모든 방향이 다 막혀 도저히 목적구를 칠 수 없게 된 상황. 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최악의 공을 쳐야 한다. 여기서 주성치는 쿵후와 당구 기술을 접목해 아크로바틱 한 샷을 성공시킨다.
이제 주소룡은 홍콩 사람들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월드 챔피언 지미 화이트를 꺾은 영웅이 된다. 시합 결과에 불복하며 난동을 피우는 용형에게 주소룡-주비홍-아모-아인은 이소룡 스타일의 발차기를 시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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