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사>의 초반부는 4명의 주인공을 최대한 매력적으로 - 그중에서도 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의 애정은 분명 강대위(姜大衛 / David Chiang Da Wei)를 향한다 - 할애된다. 이 초반부를 지나 스토리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면 영화가 이상하게 힘이 빠진다. 주인공들은 무논리로 움직이고, 여자 악당이 주인공 강대위를 강간하질 않나, 스토리 따위 상관없다 하고 찍은 것 같이 느껴진다. 장철은 오로지 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처절하게 죽는 장면에만 공을 들이는 감독이다. <사기사> 역시 영화의 초반부와 마지막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사기사>의 프로덕션 디자인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로케와 세트 촬영분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그중에서한국의 뒷골목과 주택을 재현한 세트가 1970년대 초반(스토리 상의 배경은 1953년이지만)의 한국을 상당 부분 정확히 재현하고 있다. 도시와 시골, 과거와 현재가 아무 규칙 없이 뒤섞여 있다고 할까, 그 혼란스러운 느낌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덫에 걸린 적룡
왕종(王鐘 / Wang Chung)과 헤어지고 혼자 서울 시내를 구경하던 적룡(狄龍 / Ti Lung)이 쿠라다 야스키(倉田保昭)가 이끄는 '헬로 존' 패거리와 악연으로 엮인다. 마약 밀매 조직이 손을 떼겠다고 찾아온 미군 하나를 몰래 따라가 뒷골목 으슥한 곳에서 뾰족한 송곳이 달린 너클로 잔인하게 린치 한다.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한 적룡은,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하고 달려들어 한바탕 싸움을 시작한다. 적룡의 무공은 악당을 압도하지만 머리 숫자로 덤벼드는 데에는 이길 도리가 없다. 쿠라다 야스키는 정신을 잃은 적룡의 주먹에 너클을 몰래 끼운다. 적룡은 하루아침에 미군 살해범 누명을 쓰고 현장에서 검거된다.
친구를 구하라
강대위는 신문을 통해 적룡의 소식을 접하고 크게 놀란다. 피살된 미군은 '헬로 존'에서 봤던 자이고, 적룡은 같은 부대 전우였던 것. 이번 사건이 헬로 존 패거리가 꾸민 음모임을 직감한다. 강대위는 혼자서라도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 방법이란 헬로존에 쳐들어가서 두목으로 보이는 쿠라다 야스키와 담판을 짓는 것이다 참으로 순진한 방법이지 않은가?
단신으로 쿠라다 야스키를 만난 강대위는 사건의 전모를 안다며, 부하 중 한 명을 자수시키고 대신 적룡을 석방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 악당이 이 말을 순순히 따를 리 없다. 결국 두 사람은 주먹과 주먹으로 승부를 겨누는데, 이 모습을 감시 카메라로 몰래 지켜보는 자가 따로 있으니 전직 군인 앙드레 마퀴스(Andre Marquis)와 그의 여자 금비(金霏 / Tina Chin Fei) 커플이다. 두 사람이 헬로존의 진짜 보스다. 금비는 한국여자인데 '악녀'의 클리셰란 클리셰는 모조리 끌어모아 만든 캐릭터다.
강대위가 쿠라다 야스키를 거의 때려눕히기 직전, 두목이 보낸 부하들이 강대위를 협공한다. 이 부하 무리들 중 강대위에게 목이 꺾여 죽는 이는 장차 홍콩 무술영화의 대들보가 될 원화평(袁和平 / Yuen Wo-Ping) 사부이며, 청바지를 입고 끈질기게 강대위를 괴롭히는 인물은 <황비홍>1편에서 이연걸과 멋진 승부를 펼쳤던 '엄진동' 임세관(任世官 / Yen Shi Kwan)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던 강대위는 친구 적룡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뒤늦게 나타난 금비는 강대위를 죽이려는 쿠라다 야스키를 제지한 뒤 부하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쓰러진 강대위를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다 옷을 벗기 시작한다. 다음 날, 금비는 두목 앙드레와 강대위의 만남을 주선한다. 강대위가 꽤 쓸만해(주먹으로도, 잠자리에서도?) 보였던 모양이다. 외딴 고성(古城) 앞에서 강대위와 앙드레가 만난다. 앙드레 쪽은 승용차에 부하들을 이끌고 나왔고, 군복 차림의 강대위는 혼자 이들을 상대한다. 또 한 번 적룡을 풀어달라 요구하고, 어김없이 싸움이 벌어지며, 강대위는 달리는 자동차에 직접 매달리는 스턴트를 시도한 끝에 땅바닥을 구르고, 악당들이 쏘는 총을 피해 달아난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한편 육군병원에 있던 진관태(陳觀泰 / Chen Kuan Tai)와 그의 친구 왕종(王鐘 / Wang Chung)은 헌병대가 체포된 적룡을 보게 된다. 육군병원과 헌병대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다는 우연과 적룡의 차를 얻어 타고 서울까지 왔던 왕종이 하필 이 자리에 있었다는 우연이 겹친다. 이 우연은 왕종으로 하여금 적룡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왕종의 친구인 진관태는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는 공식에 함몰되어 적룡 탈출 계획을 함께 꾸민다.
탈출을 위해선 권총 한 자루가 필요하다. 왕종은 총을 구하려고 서울 뒷골목을 돌아다니는데, '밀수 대마왕' 헬로존 패거리와의 조우는 필연적이다. 이 자리에서 쿠라다 야스키는 왕종에게 적룡의 청부살인을 제의한다. 왕종은 흑막을 캐기 위해 이를 수락하고, 다음 날, 왕종은 서울역 사물함에서 악당들이 준비한 총과 돈을 찾는다. 악당들은 당연히 왕종을 미행을 한다. 구(舊) 서울역 광장, 택시 승강장의 풍경을 홍콩영화에서 발견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병원으로 돌아온 왕종은 총을 진관태에게 건네고, 진관태는 이 총을 자신의 연인이자 간호사 정리(井莉 / Ching Li)에게 주고, 정리는 기꺼이 적룡이 잡혀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그 총을 전달한 뒤 자신은 인질이 되어 탈출을 돕는다. 적룡은 정리를 붙들고 인질극을 벌여 병원을 빠져나오는 데 까지는 성공한다. 그러나 병원 앞에 왕종의 청부살인을 기다리던 헬로 존 패거리가 있다. 이들은 진관태, 왕종, 적룡, 그리고 정리를 향해 권총을 쏜다. 그리고 하필이면 정리가 이들의 흉탄에 맞는다. 결국 진관태는 일면식도 없는 친구를 단지 친구의 친구라는 이유로 구하려 했다가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다.
분노의 게이지는 끝 모를 상승을 거듭하는데..
도망자 신세가 된 진관태, 왕종, 적룡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자재 야적장으로 숨는다. 그리고 강대위도 적룡을 찾아 이곳에 도착한다. 주인공 4명이 비로소 모였음에도 영화는 비관적이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동반자살을 앞둔 4명의 남자같다. 모두 타인을 돕다가 인생이 끝장나기 직전이다. 외국(한국)에서 헌병대에 쫓기고, 악당들에게 쫓긴다. 이들은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들의 고향은 공산당이 차지한 중국 본토인가, 아니면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대만인가, 그것도 아니면 영국 식민지인 홍콩인가?
자연스레 이들의 리더가 된 강대위는 탈출을 위해 '헬로 존'의 여자 이려려에게 도움을 청한다. 도망을 가려면 미군의 군복이 필요했고, 이려려는 기꺼이 강대위를 위해 군복을 훔쳐다 준다. 4명의 남자는 이려려와 함께 온 술집 여인 4명과 함께 죽기 직전 마지막 파티를 연다. 이려려는 강대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날 밤 그의 품에 안긴다. '헬로 존' 악당들이 이려려를 가만 둘리 없다. 금비는 자기가 취한 강대위의 여자라는 이유로 이려려의 눈에 비도(飛刀)를 날려 죽인다.
죽음의 장충체육관
주인공들의 은신처는 악당들에 포위당한다. 금비와 쿠라다 야스키가 부하들을 이끌고 이들을 죽이러 왔다. 강대위는 적룡, 진관태, 왕종이 어떻게든 악당들의 발을 묶어 두고 있을 때, 빈집이 된 헬로존을 습격해 범죄증거를 찾아온다는 계획을 짠다. 그리고 감독 장철은 처절하다 못해 질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의 마지막 20분을 결투 장면으로 채운다.
적룡, 진관태, 왕종 트리오는 악당들에 쫓겨 장충체육관 앞 광장에 도착하자, 더 이상의 도주를 포기하고 싸움을 선택한다. 악당들은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나고, 트리오는 광장에서 싸우다 체육관 안으로 무대를 옮겨 싸움을 이어간다. 뜀틀, 링, 역기 같은 운동기구들이 무기로 동원되고, 연인을 잃은 진관태는 악당들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겠다는 각오로 분투를 벌인다. 한편 강대위는 헬로존 술집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려려를 보고 울분을 삼킨다. 사신(死神)으로 변한 강대위는 이곳에 남은 부하들과 보스 앙드레 마퀴스와 혈전을 시작한다. 칼로 찌르고, 악당의 얼굴 가죽을 뜯고, 목 울대를 손날로 내리쳐 죽인다. 이 과정에서 총상을 입기도 하지만 기어코 모두의 숨통을 끊는다.
장충 체육관의 싸움은 더 처절하다. 세 명이 악당들의 수를 비교적 줄이는 데 성공하지만, 금비와 쿠라다 야스키는 총이 있다. 맨 손으로 총을 이길 수 없다. 이때 진관태가 나선다. 그는 총알을 제 몸으로 막으며 전진하여 금비의 총을 뺏는 데 성공하지만 숨을 거둔다. 왕종의 복부에는 투창이 꽂힌다. 쿠라다 야스키는 피부 밖으로 삐져나온 창을 붙잡아 기어이 왕종의 몸에서 뽑아낼 때, 장철의 화면은 어김없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왕종의 모습을 슬로모션으로 포착한다. 증거를 확보하고 뒤늦게 체육관으로 달려온 강대위는 적룡과 힘을 합쳐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하지만 육군 헌병대가 이미 체육관을 포위한 상태다. 강대위는 필사적으로 증거 서류를 흔들어보지만, 헌병대의 총구는 악당과 영웅을 구분하지 못한다. 집중 사격 후 체육관 안으로 진입한 헌병대는 서로 손을 부둥켜 잡고 죽은 네 남자를 발견한다. 장철 감독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은 더럽혀 지고, 선은 악에 의해 무릎을 꿇는다. 전쟁, 학살과 같은 20세기의 격랑을 몸소 체험한 감독과 대중들은 영화를 통해 또 한번의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려 한 것인가.
Navigation - 사기사
이전 글 : 1부 Strangers in Korea
사기사(四騎士 / Four Riders) 1972년 - 1부 Strangers in Korea
는 장철(張徹 / Chang Cheh)이 애지중지했던 4명의 스타, 적룡(狄龍 / Ti Lung), 강대위(姜大衛 / David Chiang Da Wei), 진관태(陳觀泰 / Chen Kuan Tai), 왕종(王鐘 / Wang Chung)을 내세워 만든 현대 배경의 액션영화
egfilmarchive99.tistory.com
Chronicle - 오우삼 / John Woo
3. 연경인(年輕人 / Young People) 1972년 - 조감독
연경인(年輕人 / Young People) 1972년 - 1부 대학얄개
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의 영화라면 냉혹한 현실에 겁없이 도전하다 온 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죽어가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1972년작 은 죽는 사람 하나 없는 캠퍼스 청춘
egfilmarchive99.tistory.com
5. 자마(刺馬 / The Blood Brothers) 1973년 - 조감독
'영화 > 봐서 나쁠 건 없는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SWAT 특수기동대(S.W.A.T) 2003년 - 생도와 교관 (0) | 2024.03.04 |
---|---|
레일로드 워(鐵道飛虎 / Railroad Tiger) 2016년 - 1부 홍콩의 성룡에서 중국의 성룡으로! (1) | 2024.01.03 |
사기사(四騎士 / Four Riders) 1972년 - 1부 Strangers in Korea (0) | 2023.11.29 |
오랑팔괘곤(五郞八卦棍 / The 8 Diagram Pole Fighter) 1984년 - 2부 미치거나 혹은 스님이 되거나 (2) | 2023.09.17 |
오랑팔괘곤(五郞八卦棍 / The 8 Diagram Pole Fighter) 1984년 - 1부 양가장의 비극 (0) | 2023.09.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