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張徹 / Chang Cheh) 감독의 영화라면 냉혹한 현실에 겁없이 도전하다 온 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죽어가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1972년작 <연경인>은 죽는 사람 하나 없는 캠퍼스 청춘 스포츠 영화다. 주연배우 강대위, 적룡, 진관태는 비극적 영웅의 아우라를 훌훌 벗어 던지고, 스포츠와 음악에 몰두하는 젊은 대학생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어두운 현실, 고뇌, 절망 같은 감정이 없다. 장철 감독은 그동안 자신이 영화에서 수도없이 죽였던 젊은 스타들에게 <연경인>로 작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쇼브라더스(邵氏兄弟) 작품인 <연경인>은 1972년 7월 7일 홍콩에서 개봉했다. 각본은 장철과 예광(倪匡 / Ni Kuang)이 공동으로 썼으며, 무협사극이 아니어서인지 유가량 대신 그의 동생인 유가영(劉家榮 / Lau Kar Wing)이 당가(唐佳 / Tong Kai)와 함께 액션연출을 맡았다. 진훈기(陳勳奇 / Frankie Chan Fan Kei)가 음악을 진두지휘했다.
오우삼(吳宇森 / John Woo)이 이 영화의 조감독을 했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쇼브라더스 스튜디오는 쉴틈없이 영화를 공장처럼 찍어내던 터라 조감독 오우삼은 자연스레 강대위, 적룡 등과 허물없이 지내게 됐다. 강대위와 적룡은 오우삼이 배우를 꿈꿨다는 걸 알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장철 감독에게 추천을 했는데 장철 감독은 그때마다 딱 잘라 거절을 했다고. <연경인> 촬영 때 배역 하나가 급히 펑크가 났는데, 강대위와 적룡은 옳다구나 싶어 스태프와 짜고 오우삼이 연기할 수 밖에 없도록 현장을 세팅해 두었다. 이쯤되면 장철도 어쩔 수 없겠지 했는데 여지없이 오우삼의 연기 데뷔를 반대하고 나섰다. 배우들이 대체 왜 이렇게 싫어하냐 물으니 장철 감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우삼은 감독이 될 재목이야. 배우 하겠다고 허튼 바람 넣지마!" 장철의 바람대로 오우삼은 감독이 됐고, 이때의 아쉬움은 본인 영화에 틈틈이 카메오 출연하며 달랠 수 있게 됐다.
드러머
<연경인>의 오프닝 씬은 강대위(姜大衛 / David Chiang Da Wei)의 드럼 솔로 연주다. 드럼 스틱을 폼나게 돌리다 누군가의 몸에 꽂아 버리지는 않을까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원래 연주자였나 싶을만큼 수준급 드럼 실력을 보여준다. 이 시절 강대위는 미친 존재감을 뽐냈다. 작고 마른 체구인데도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강대위는 뮤직&댄스 동아리의 정신적 지주이다. 친구들과 함께 공연 연습을 하던 중 진미령(陳美齡 / Agnes Chan Mei Ling)이 찾아와 동아리 가입을 신청하고 오디션 격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뮤지컬 시퀀스로 이어진다. 해맑은 표정의 남여 대학생들은 짜여진 군무를 추는데, 꼭 쇼 브라더스 배우 훈련반 소속 배우들의 워크샵 무대를 보는 기분이랄까.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 순백의 옷을 입은 소녀가 박수를 치는데, 당시 인기를 끌던 소녀가수 진미령이다. 진미령은 이 동아리에 가입하길 원하고, 꼭 복학생 느낌의 우마가 나서 입부 테스트를 치른다.이렇게 <연경인> 초반 10분은 노래와 춤으로 채워진다. 버라이어티 쇼 무대를 떠올리면 된다.
아그네스 챈으로 잘 알려진 진미령은 여고생 때 데뷔해 순식간에 스타가 된 가수다. 통기타를 치며 포크 계열의 팝송을 주로 불렀는데 <연경인>은 바로 그 시절 진미령의 모습이 담겨있다. 진미령은 1972년 일본에 진출하여 그 이듬해 1973년 일본레코드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아이돌 스타로 오랜 사랑을 받았다.
<천녀유혼>의 도사 연적하로 친숙한 배우 우마(牛馬 / Wu Ma)가 음악 동아리의 감초, 혹은 트러블메이커 같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70년대 한국 청춘영화, 얄개 시리즈 같은 데서 손창호 배우가 했던 역할과 흡사하다. <연경인>에서 우마는 나서기 좋아하는 선배 역으로 나와 진미령의 동아리 가입 심사를 주관한다. 통과의례로 어리디 어린 진미령에게 강제로 담배를 피게 하다 유리창을 깨며 날아든 야구공에 맞아 혼쭐이 난다. 진미령은 하늘같은 선배를 다치게 한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 학교 운동장을 살피기 시작한다.
야구부 주장과 무술반 주장
야구공의 주인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야구부 주장 적룡(狄龍 / Ti Lung)이다. 소녀 진미령이 겁없이 다가와 우마에게 사과하라 요구하는데, 이에 응하는 척 하다 우마를 쓰러트려 놀림감으로 만든다. <연경인>에서 적룡은 양(陽) 그 자체다. 직선적이고 굽힐 줄 모르며 항상 우두머리여야 하는 인물이다. 동아리 친구가 수모를 당하자 결국 강대위가 나선다. 강대위와 적룡이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을 만들지만, 강대위는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먼저 돌아선다. 강대위는 냉철하고, 차분한 음(陰)이다.
야구부 패거리는 강당에서 수련 중인 무술반 학생들과도 충돌을 빚는다. 무술반 주장은 '마영정' 진관태(陳觀泰 / Chen Kuan Tai)다. 야구부가 무술을 비웃으면서 적룡과 진관태가 한판 격돌할 뻔 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여학생 진의령(陳依齡 / Irene Chen Yi Ling)이 끼어들며 싸움이 멈춘다. 진의령은 진관태의 현 연인이지만, 적룡과도 묘한 썸을 탄다. 진관태는 과묵한 성품의 캐릭터로 모든 말을 두 음절 단어로 끝맺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영화는 강대위, 적룡, 진관태의 라이벌 구도를 만든 다음 각자의 사정, 대결, 그리고 우정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 2부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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